전라도 정명 천년 기념 특별기획- 우리 마을 어르신 구술 프로젝트 ③ - 성북동 김금덕 어르신(67세)
“젊어서부터 일을 많이 해 그랑가
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퍼
포도시 앉아서 밥해 묵고,
씻고 그라제”
입력시간 : 2018. 09.13. 15:49


전라도 정명 천년을 기념해 어르신들의 인생 경험과 여정을 기록함으로써 인생에 대한 보람

과 자긍심 고취는 물론 후손들에게 삶의 다양한 지혜와 추억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본지는 ‘2018 우리 마을 어르신 구술 집필사업’을 진행한다.

우리 마을 어르신 구술 집필사업은 어르신들의 인생 정리 작업을 통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함으로써 행복지수를 높이고, 어르신들의 이야기 상대가 돼 드림으로써 봉사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불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마을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기록으로 보존해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는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담아 본다. / 편집자 주



여가 우리 집이여. 혼자 상께 집이 엉망인디, 우쩌까.

내가 다리가 아퍼 잘 못움직인게 사방에 끈을 달아놨당께. 이렇게 앉아서 끈을 댕겨 문도 열고 닫고 해야 혀. 누가 옴 냉큼 못나강께….

오메 내가 살아온 세월을 얘기 할람 기가 차당께. 나 큰 애기 때 고향은 목포여. 딸셋 아들넷중 둘째고, 딸로는 셋째여. 그랑께 칠남매제.

아버지는 시골서 살다 농사가 적응께 목포로 와 군함에서 화물을 등짐으로 옮기는 일을 했제.


그전에는 식구는 많고 사는게 어려웅께 암것도 못 배웠어. 외가 동네 가서 잠잘 때 들응께 나를 언능 보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홉 살 때 이모가 소개해줘 외가 동네 시골로 애기 보러 갔제. 거가 아마도 외달도일 것여. 거서 한 2년 있었을 것이여.

그리고 집에 와 오빠 따라 댕김서 바닷가 배서 나무 깎아 내림 나오는 톱밥을 머리에 이고와 불 때고 그랬제. 그러다 거 뭣이여, 김발 만드는 공장에를 댕겼제.



“신랑이 술이 과하더라고, 그리고 술 마심 쫓아 댕김서 두들겨 패고”

나 스무살 되던 해 언니 중매로 강진 덕서리로 시집갔어. 신랑은 즈그 누나가 소개했고. 그리고 바로 애기가 생겨 그 이듬해 큰아들을 낳았제.

신랑이랑 난 12살 차이났는디, 신랑은 농사가 적어 라디오를 팔러 댕겼어. 그땐 라디오가 참말로 귀할땐께.

근디 술이 과하더라고, 그리고 술 마심 쫓아 댕김서 두들겨 패고….

그래서 아들 둘 델고 도망 나왔어. 큰놈이 여섯 살, 작은놈이 네살이였제. 한나는 걸리고 한나는 업고 나왔응께. 새벽 네시에….

그때 품삯이 천원할 때 밭에서 일함서 지냈어. 날 찾을라고 애들 아버지가 친정에 살다시피 했다드만. 근디 남동생이 잘 모르고 내가 있는 거처를 알려줘 잡혀들어 갔어.

첨에는 술도 들묵고 하드만 난중에는 똑같어, 낫 가지고 쫓아 댕기고 방에다 오줌 싸고, 그래서 또 무안으로 도망나왔제.

근디 큰 아들이 아홉 살 묵어가지고 핵교는 보내야것고 애통이 터져 죽것드라고. 그래서 목포 산정동으로 와 살았는디, 그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

내가 서른네살 때인가 우리 신랑이 죽었다고 연락이 왔더라고. 근디 난 안갔어. 언니하고 동생댁만 가고.

난 목포에서 그물 손질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어, 그 일이 노임을 많이 줬거든. 그때도 몸이 안좋더라고.



“남자가 얼굴이 시커매 가지고 맘에 안들더만”

그러다 여동생이 시집을 가라며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나주로 나를 델고 왔어, 남자가 얼굴이 시커매 가지고 맘에 안들더만.

근디 여동생하고 그 남자 재수하고 짜고 날 음료수라고 암바사 같은 걸 묵였는디, 내가 툭 떨어져 버렸제. 아마도 그게 술이였나벼. 그리고 날 그 남자 집에 재워브렀어.

난 그날부터 그 집에서 살았당께. 그 남자 애들이 여섯살, 일곱살, 열살 아들 한나에 딸둘이 있더만.


그 남자가 나보다 다섯살 어렸어, 그 남자는 노가다 일 댕기고 함께 2년 살았는디, 산에 점보러 가고 싶다고 가드만 점쟁이가 애기 소리함서 같이 살아야 한다고 끌어 댕겨븐께 그 점쟁이하고 살아 블더라고.

그 남자랑 살면서 딸도 한나 낳았는디, 그 딸이 막 돌 넘어서 그랬제.

그러고 나서도 그 남자 애들도 내가 4년 넘게 키웠어. 잡부로 미장일 하면서 그 남자 애들은 그 남자 재수한테 맡기고, 다섯살 난 딸은 내가 델꼬 다님서 일했제.

딸이 영판 수말스러워 옆에 앉혀놓으면 그대로 있었당께.

그러다 나는 돈을 많이 준다고 하길래 벽돌 메우는 일을 배워 하기 시작했제. 그 남자는 점쟁이랑 살면서 생활비도 안주고, 쌀도 안팔아 주고, 막 이혼만 해주라고 하더라고.

그러고 이혼 했는디, 이혼해서도 지 자식을 안 델꼬 가드만, 얼마 후 점쟁이한테 델꼬가 키우다 못 키우고 지 부모 집에 맡겼다 하더라고.



“키울 땐 힘들더만 딸을 둬 다행이여. 병원도 딸이 델고 댕기고”

그때 그 남자랑 살 때는 우리 아들들은 친정에서 돌봐줬제. 큰아들은 중학교 나와 서울서 살고, 둘째 아들은 어려서부터 껌장시를 함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보태주고 하드만, 커서는 중화요리집을 했어. 그러다 쌀가게를 하드만 서른살 때 많이 아퍼서 죽었어.

큰아들이 동생 죽고 나서 그 충격으로 잠을 못자는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10년 넘게 놀았땅께.

막둥이 딸은 인자 서른 묵었어. 시집가 여덟살 여섯살 아들 둘 뒀제. 키울 땐 힘들더만 딸을 둬 다행이여. 병원도 딸이 델꼬 댕기고.

50대 초반에 자궁경부암이 왔어, 목에 있는 인파선까정 다 번져갔고 수술도 못하고 항암치료를 받았제. 그런디 아조 죽겄더라고, 그래서 항암치료 받다 병원을 안가고 말아브렀어.

그러고는 튀김장사를 따라 댕겼어. 한 일년 따라 댕김서 배워 내가 차렸제. 영산포 주공아파트 앞에서도 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님서 했어.

그렇게 7년을 살다 다시 몸이 안 좋아징게 화순전대병원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댕겼제. 그래도 병원댕김서 장사는 계속했어.

중간에 큰아들보고 하라고 닭강정 집을 차려줬는디, 다 망해묵고, 난중에는 붕어빵 장사도 하고 그랬제. 그것만 했간, 붕어빵 장시 끝나고 밤이면 동네 돌아 댕김서 폐지도 주워 모아 팔았제.

큰 아들이 제대로 벌이를 못하고 있응께 한푼이라도 보탤라고 그러고 댕겼제. 애미는 자식 굶는 꼴은 못보잔여.



“17년간 장사해 지금 사는 집도 샀어. 근디 지난해부터는 암것도 못하고 살아”

장사하면서 산에가 버섯도 캐 말려서 갈아 묵고, 미나리도 뜯어다 살짝 쪄서 말려 갈아 묵고 했더니만 암이 다 나아브렀어, 병원서 5년 동안 이상 없다고 정상이랴. 난 속으로 ‘거짓말 마쑈’ 햇는디, 안즉까정 괘안쿠먼.

17년간 장사해 지금 사는 집도 샀어. 근디 지난해부터는 암것도 못하고 살아. 원래 젊어서부터 일을 많이 해 그랑가 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퍼 전동차 타고 댕김서 장사했는디, 인자는 한발짝 걷기도 힘등께 암것도 못하것어.

뽀돗이 앉아서 밥해 묵고, 씻고 그라제. 얼마전 백내장 수술도 허고.

수급자로 나오는 돈이랑 노령연금 받아 쓴디, 병원비는 다 감당을 못해, 요즘은 왼손이 뻘겄케 자꾸 부어 정밀검사를 받으러 며칠 있다 병원을 갈라고 예약해 놨는디 검사비는 보험이 안된께 걱정이구만.

사위가 광주서 체육관을 한디 즈그들도 새끼 키우고 뭣이 여유가 있겄어. 자식들한테 부담을 안줘야 한디 나이가 묵어간께 아픈대만 늘고 큰일이고만. 노인들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녀.


정리 박은정 기자 gnp@goodnewspeople.com        정리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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