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39>/ 고려 유학자 최승로
불교가 왕조 탄생의 정신기반인 나라에서
유학을 정치의 실천이념으로 자리잡게 해
거란 방어+불교 적폐+호족 견제+中 문물 경계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에 자신의 사상 집약
입력시간 : 2018. 12.01. 10:52


2010년 12월 2일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2010불교문화엑스포 팔관회' 봉행행사장에서 불자들이 찬불가를 부르고 있다. 팔관회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불교 전통제사의식인데, 최승로는 왕에게 올린 ‘시무 28조’에서 이의 축소를 주장했다.
한국사를 강의하는 교수들 간에 우리 역사 가운데 강의하기가 제일 어려운 시기를 들라면 첫손에 꼽는 것이 고려 시기라 한다. 다른 시기는 그래도 손에 잡히는 나름의 체계가 있는데, 고려는 그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해볼 여지는 있지만, 연구가 어느 정도 되었다 해도 여전히 '고려'할 일이 남을 것 같은 시기가 고려 시기라서다. 그래서 "고려의 역사는 고려만 하다 끝나는 것 같아"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너스레를 떨곤한다.

어쩌다가 고려 시기가 이 모양이 되어버렸을까? 그 까닭은 고려 사회의 복잡한 성격 때문이다. 특히 지배이념의 복잡성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불교국가다. 그렇지만 유학적인 측면들도 적지 않고 풍수지리설의 지배를 받는 부분도 이외로 많다. 이는 유학자 최승로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의 앞 나라인 통일신라는 불교가, 뒤 나라인 조선은 유교가 각각 정치와 생활을 지배하는 이념으로 비교적 명쾌하게 자리잡고 있었지만, 고려는 불교나 유교 중 어느 하나가 절대우위를 점하지 않는 복잡성을 띠고 있었다. 태조가 지은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보면, 불교와 지리도참설, 유학이 골고루 섞여 있다. 다만, 각 이념들이 나름대로의 역할분담은 하고 있다.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데 반해서 유학은 정치의 실천이념으로 존중했다. 성종대 유학자였던 최승로는 "불교는 마음을 닦는 근본이요, 유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다"라고 말했다. 즉, 불교는 개인적인 심성을 수행하는 데 필요하고 유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합리적인 방안을 끌어내는 데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렇듯 불교와 유학은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풍수지리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시기 유학, 하면 맨 처음 꼽는 것이 최승로와 그가 올린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이다. 거기에는 유학적인 정치철학이 잘 반영되어 있다. 최승로는 927년에 경주에서 태어났다. 잘 알다시피 이 시기는 후삼국이 대립하면서 서로 격렬하게 싸우던 때였다. 「삼국유사」를 보면, 최승로의 아버지 최은함은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는데 당시 흔히 하던 식으로 중생사라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빌어 최승로를 낳았다고 한다. 최승로는 신라 육두품 귀족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왔다고 한다. 12살 때 논어를 읽어서 태조 왕건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일찍부터 유학에 대한 소양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또 당시 중국에 갔다온 유학생들이 많았지만, 이들과 달리 최승로가 순수 국내파였다는 점도 의미 있는 사실의 하나다. 신라 육두품 출신으로 유교에 아주 소양이 깊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최승로가 고려에 들어온 처음에는 그렇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뒤에 최승로가 광종의 정치에 대해 꽤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아마 광종에게서는 그다지 정치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반면, 경종과 성종 대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시무 28조」를 올리고 죽기 바로 전해인 988년에는 당시에 사실상의 최고 관리인 문하시중에 봉해지기까지 한다.

최승로 사상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무 28조」이다. 성종이 즉위한 직후 새로운 정책을 펴기 위해서 여러 관료들의 의견을 구하는데, 이때 최승로가 제시한 것이 이 「시무 28조」다. 시무책이라고 하면, 당면 과제, 즉 당장 힘써야 할 일에 대한 의견을 말한다. 「시무 28조」는 국방, 불교, 사회문제, 왕실, 대 중국 관계, 토착신앙 등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가운데 국방문제는 주로 그 당시 거란과의 관계로 인해 북계(北界)를 확정하는 내용과 그곳에 대한 방어책 등이 실려 있고, 불교문제는 승려가 궁정을 출입한다든가 하면서 생기는 폐단과 사찰을 지나치게 많이 짓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사회문제는 당시 호족들의 세력이 너무 강한데, 이를 그대로 놔두면 문제가 있으므로 지방관을 파견해야 하며, 일반민의 부역을 감소시켜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복식제도의 정비도 건의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오늘날에 와서 주목받는 주장으로,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신중하자는 의견도 제시하고 있다. 요즘 얘기하는 신토불이나 마찬가지 의견이었다. 그뿐 아니라 연등회나 팔관회를 축소해서 개최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토착화한 신앙들에 대해서도 견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의 맨 앞에서 태조부터 시작해서 경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의 치적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이상적인 군주상을 제시하였다. 군주상까지를 제시함으로써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서 당시 국가 운영의 중요 과제 대부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다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그 의견의 바탕에는 고려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사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고려 불교의 개략적인 흐름은 대체로 초기에는 교(敎)·선(禪)이 양립하고 그 다음 교·선의 절충단계를 거쳐서 마침내 교·선의 통합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초기 불교 교·선 양립 때는 당시 국가가 교종과 선종 가운데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뜻이 된다. 교·선 간에는 교리상의 대립도 있었겠지만, 양 종파 사이의 세력 대결이란 측면도 있었다. 따라서 교와 선을 양립시켰다는 것은 두 세력의 현실정치적 기반을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균형상태였다는 뜻이 된다. 이런 균형상태를 전제로 교·선 양립의 정책을 입안한 사람이 균여(均如)였다. 균여는 923년에 송악에서 가까운 지역인 황주에서 태어났다. 속세의 성은 변씨다. 아버지는 변한성이었는데,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지방에 은거하였던 지식인으로, 소(小)호족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여 집안에는 승려가 많았다. 그 영향을 받아서 균여도 승려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균여의 주장은 한마디로 "성상(性相)이 서로 융회(融會)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때 성이라는 것은 사물의 원리, 그리고 상은 사물의 현상을 말한다. 성과 상, 즉 원리와 현상은 실제에서는 각각 화엄종과 법상종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균여의 사상은 화엄사상을 근간으로 해서 법상종 사상을 융합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종은 전통적으로 왕실과 관련이 깊다. 반면, 법상종은 통일신라 이래로 호족층에게 수용됐기 때문에 호족의 정치이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화엄종을 주로 하고 법상종을 종으로 했다는 것은 결국 왕권을 중심으로 중소 호족층을 결합하려는 정치적인 측면을 반영하고 잇는 것이다. 최승로가 불교는 인간의 마음을 닦는 역할을 한다고 했지만, 균여의 행동을 본다면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하긴 어느 때고 시대상을 초월하는 사상은 없다.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모든 것이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승로처럼 말해서 불교의 역할을 인간의 수양에 제한시켰으면 좋겠다고 하겠지만, 사실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제한시키기가 곤란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불교도 사회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균여의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면, 곧 광종대의 정치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제정치의 기초였다고 보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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