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을 찾아서<148> - 추사가 넘본 이광사
우리 아름다운 서체 '동국진체' 완성
독창적 서체 대흥사·천은사 등에 남아
나주 괘서사건으로 완도 신지도까지 유배
입력시간 : 2019. 09.09. 12:54


전남 완도군은 29일 신지도 금곡마을에 자리한 250년 생 소나무의 이름을 원교 이광사 선생이 심었다는 의미를 담아 원교목(圓嶠木)으로 지었다고 밝혔다
추사 김정희 하면 잘 알고 있지만 '동국진체'로 조선의 자주성을 논한 이광사(1706~1777)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더구나 1774년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린 이광사 초상(보물 제1486호)까지 있는데도 그렇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로서 평가받는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의 아버지라고 하면 알 것이다.

전라도 땅 완도 신지도에서 23년의 유배생활 끝에 사망했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서체인 동국진체의 완성자가 바로 이광사다. 김정희의 추사체 이전 동국진체가 있었고 이광사를 이어받아 김정희가 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 한국서예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지금도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과 해탈문, 침계루 현판, 그리고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극락보전, 명부전 현판을 쓴 사람으로 전설적인 이야기가 남아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갈 때 해남 대흥사에 들려 현판으로 걸려있는 이광사의 동국진체를 보고 글씨도 아니라고 초의선사에게 떼어버리라고 했으나 유배가 풀려 8년만에 서울로 복귀하면서 이광사의 글을 찾아 대웅전의 현판으로 다시 걸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글씨 속에 숨은 진실에 감동한 것이다.

지금도 이광사와 김정희의 글씨가 한 공간에 걸려 있다. 또 지리산 천은사에서 자주 화재가 발생한다고 하자 이광사가 물이 흐르듯이 수체로 쓴 현판을 일주문에 건 이후 화재가 없고 사찰이 부흥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그가 쓴 현판은 현재까지도 걸려있다. 말 그대로 한국의 서예를 빛낸, 중국을 흉내낸 서체에서 벗어나 우리 조선만의 독창적인 서체를 주창한 '원교체'라고도 하는 '동국진체'로 남도문화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세상은 새롭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나 조선은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는 왕권 중심사회로 매몰되고 있었다. 그 시기에 이광사는 태어났다. 몰락한 왕족가문으로 아버지 이진검은 나주로, 백부 이진유는 추자도로 유배됐다가 1727년 아버지는 사망하고 백부는 옥사한다. 이후 원교는 출사를 단념하고 오로지 양명학과 서예에만 몰두했다. 그러다가 1755년 2월 나주객사 망화루 기둥에 영조를 비난하는 나주괘서 사건이 발생한다.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가 소론편을 들었다고 뒤주에 가둬 죽이는 참극까지 연출한 계기가 됐다. 특히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 형제도 영조의 뜻에 동조했는데,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파와 경종을 살해하고 무수리 서자 출신이라고 배척하려는 소론파와의 싸움에 휘말린 것이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고 노론과 소론과의 권력다툼에서 발생한 것이 나주괘서사건의 팩트라는 것이다. 결론은 사도세자의 반대편 노론이 승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주동자라고 나주에서 30년 유배생활을 하던 윤지가 혐의를 부인하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이광사는 윤지와 필묵회라는 모임을 같이 한 모양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50이었다. 서울 동그재를 떠나 나주에서 학문과 서예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반성하기보다 파벌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주자학에다가 도참사상까지 끼어들면서 전라도는 황량하게 변했다. 이광사는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됐다. 함경도 부령의 유배지에 도착한 날부터 이광사는 붓을 잡았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노론계열의 윤명동이 "이광사는 죄인의 몸으로 선비들을 모아 문필을 가르치고 어린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으니 회령부에 안치한 죄인 이광사를 절해고도로 이배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상소로 인해 1762년 전라도 진도로 옮기기로 했다가 진도는 너무 섬이 크니 절도안치 한다고 해 58세 때에 완도 신지도로 이배되고 1777년 8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신지도 금실촌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황치곤 등의 마을주민들과 잘 어울렸다. 원교는 주민들에게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가르쳤으며 여기에서 이광사의 동국진체의 이론서인 서결(보물 제1969호)이 완성됐다. 서결은 서법의 비결이라는 뜻으로 필결이라고도 한다. 동국진체라고 하는 조선 고유의 서체인 원교체의 형성과정과 이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며, 서예 원론에 대한 논으로 부터 문방사의 선별법과 같은 세부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신지도에서 그는 꾸밈없이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겼으며 인간의 예술이 자연의 섭리와 일치되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다. 문학에 대해서도 모방을 배제한 자득을 주장했다. 작가는 개성있는 창작행위를 으뜸으로 삼아야 하며, 옛사람의 문구를 끌어다가 시를 짓는 것을 배격하고 '개성과 창작'을 강조해 가르친 것이 그의 첫째아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원교 이광사는 중화일변도의 정치와 문화 등의 사대(事大)에서 벗어나 조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자각은 서예에서도 일어났다. 그래서 실학에서 많이 쓰이던 '진(眞)'이라는 명제를 빌려 독창적인 그의 서체를 '진체'라고 했으며, 나중에 이를 '동국진체'라고 부르게 됐다. 전라도는 인가의 보편적 가치와 질서를 지향하는 인간미가 넘치는 예술혼을 자랑하고 있는 지역임을 이광사를 통해 느낄 수가 있다. 전라도 섬에 유배된 사람들은 당시로서는 중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가까이 할 수가 없었으나 전라도 사람들의 심성상 이들을 방치하지 않고 따뜻이 보듬어 줬다. 이광사만이 아니라 전라도에 유배온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들의 따뜻한 예우를 받았으며 작품활동이나 집필활동에 필요한 인적 물적 지원도 부족함이 없이 받았다.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는 전라도에서 중앙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지방에서 형성된 문화가 중앙으로 역류해 정착된 특이한 문화역류현상까지 발생시킨 것이다. 전라도의 문화가 전국의 중심문화가 된 것이다. 이삼만, 기정진, 허백련, 안규동, 구철우, 손재형, 김용구, 하남호, 서희환, 허건 등으로 이어져 전라도를 빛내고 있다. 이광사는 당대의 명필답게 많은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강진과 해남, 완도와 구례, 부안 등지에 글씨가 남아있고, 이광사가 저술한 행서화기(제1677~1호), 필적원교법첩(제1677~2호), 원교서결(제1969호)이 보물로 지정됐으며, 1774년 신한평이 그린 이광사의 초상화(제1486호)도 보물이 됐다.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면 고요해진다'는 말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아픈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킨 위대한 전라도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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