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5일(일)
HOME 커버스토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국제 스포츠 여성.가정 건강 이웃 전국

이동하기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15> 孤山 尹善道
너무 곧아 유배-해배 점철
자연 은둔하며 지은 詩歌 국문학 백미
간척사업 등에선 애민정신 엿보이기도
입력시간 : 2008. 03.04. 10:01


해남 연동 녹우당
훌륭한 선비는 뭐가 달라도 달랐는데,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도 훌륭한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인지라 달랐다.

"아들 인미(仁美) 보아라. 자만은 손해요 이익됨은 겸손이다. 음식은 배부름에 그쳐야 하고 옷은 몸 가리는 데 족해야 한다. 말(馬)은 사람의 걸음을 대신할 뿐이다. 말안장을 호화롭게 하는 사대부들의 사치는 큰 병폐 중의 하나다. 마을 사람이나 종을 부릴 때는 꼭 곡식을 주고 품삯 가리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남을 괴롭히는 것이 가장 그릇된 것이다. 나는 50이 넘어서야 명주옷·모시옷을 입었다. 근검절약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기 바란다." 우리나라 국문학사상 시조시인의 1인자로 꼽히는 윤선도가 아들 인미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다. 최근 일부 사가들이 고산의 보길도(전남 완도군) 생활을 사치로 보고 비난하려는 경향에 일침을 놓을 수 있는 내용이다.

비록 부유한 처지에 넉넉한 생활을 했던 흔적이 발견되긴 하지만 그는 분명 16세기를 풍미한 문학인이요 우리나라 원림(苑林) 문화의 전통을 형성한 조경인이다. 토목사업에 공을 남긴 실업인이며 민중을 사랑한 정치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해남 연동 어초은 사당


가계를 보면 고산은 해남 윤씨의 16대손.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윤의중에게 유심·유기·유순 세 아들이 있었는데, 고산은 유심의 세 아들 중 둘째로 1587년 6월 22일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해남 종가에 아들이 없어 입양돼 대를 잇고 있던 작은아버지 유기 역시 아들이 없자 고산은 여덟 살 때부터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 연동에서 자랐다.

고산의 일생은 대개 유배와 출사, 학문과 은거 등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의 행장을 보면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바르며 곧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해 순탄한 일생을 살지는 못했다. 26세가 돼서야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당시는 광해군 시절로 어지러운 때. 광해군에 아첨하여 권세를 부리는 세도가의 횡포를 보고 망군빈국(忘君貧國)하는 죄를 묻는 상소를 올리고 만다. 덕택에 첫 시련기를 맞는다. 서른 한 살 되던 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고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돼 6년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지만 유배 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해남에 돌아와 처절했던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으면서 인생의 깊이를 느끼는 원숙한 나이로 들어섰다. 42세가 돼서야 출사의 꿈이 펴진다.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성산현감에 좌천,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해남에 귀향하고 만다.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을 당하자 남달리 애국의 정이 깊었던 고산은 의병을 이끌고 선편으로 강화도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왕자들은 붙잡히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이때 남하하다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를 발견한다. 이곳 산수에 안겨 나라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조정에서는 그를 지탄하는 모함이 일어 다시 일년간 경상도로 유배됐다가 해남에 돌아왔다. 이후 고산이 택한 은거지는 해남의 현산면과 완도 보길도. 현산은 첩첩산중 육로를 거쳐 찾아야 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야 할 해중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었다. 문학생활 주무대는 현산면 중에서도 금쇄동과 수정동, 이수동 세 곳. 여기서 10년을 번갈아 머물면서 '산중신곡' 등 시편을 쏟아냈고, 보길도의 부용동에서는 일곱 차례에 걸쳐 약 12년간 풍류했다. 그러나 이런 은거는 '세상을 잊은 행위'라기 보다는 '세상을 피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효종이 등극한 후 임금의 총애를 잊지 못하고 자주 나라의 부름에 응한 출사는 이 같은 본심 때문. 74세 때는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 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3년 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한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는 송시열 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됐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 말 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이니 경솔히 죽일 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유배돼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숨어 보냈다. 이렇게 고산의 출사는 9년에 불과하지만 유배 생활은 세 차례에 걸쳐 14년이 넘는다. 그때마다 은둔과 풍류의 즐거움으로 자족하기도 했지만 그의 일생은 출사와 유배, 은둔이 거듭되고 희비가 교차하는 생애였다. 다시 말해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으로 교직된 평생이었다.
복원 중인 보길도 곡수당


고산은 유배에서 풀려난 2년 뒤인 1671년 6월 11일 완도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齊)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5세. 생전에 이미 정해놓은 해남군 현산면 이수동의 묘소에 안치됐다.

확고한 자기 주관을 설정하고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조선 지성인의 한 전형 윤선도. 시문을 기록한 저작으로는 「고산유고」가 있다. 전부 6권 6책으로 되어 있는데, 정치·경제·학문·예술 전반에 걸친 그의 글이 담겨 있다. 자세히 살피면, 그는 경학 위주의 도학자이면서 의학·음양·지리에 이르기까지 해박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의 정약용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각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은 당대 최고 위치였지만,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한국 시조문학의 폭과 깊이를 심화시킨 문학적 성과다. 85세로 세상을 마감할 때 '내 어찌 세상과 어긋나서 세상은 나를 그르쳤나요'라는 시구로 자신의 비운을 한탄하다가 '높은 벼슬이야 바라지 말고 푸른들 풀처럼 살아가리라'는 다짐으로 승화시킨 시인 고산은 우리나라 조경사상 으뜸으로 꼽히는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경영한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과 세연지, 그 북쪽에 있는 동천석실을 비롯해 수정동의 인소정, 금쇄동의 회심당 등의 수경은 민간인이 지은 원림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지금도 보길도를 가본 이들은 느낀다. 380년 전 고산이 가꾼 정원을 볼 때 과학정신을 바탕으로 한 축조문화에 관심이 컸던 선현이었음을.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산은 당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추진하여 진도의 임회면 굴포에 200정보와 완도 노화면 석중리에 130정보의 해역방조에 성공했다고 한다. 16세기 현실로써는 다소 무리한 일이어서 노역의 비난이 거세기도 했지만 식량난에 시달리던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경제에 대한 안목도 남달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깊은 뜻이 전해져서인지 임회의 굴포리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을 맞으면 '고산 감사제'를 지내는데, 이는 고산이 간척으로 마련한 농토를 모두 그곳 주민들에게 희사한 은혜에 감사하는 행사라고 한다.

<구름 빛이 맑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맑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라고 노래한 '오우가'나 '어부사시사'를 보면, 고산의 자연은 인간적인 것의 전체다. 고산의 뒷길을 밟으면서 연신 느껴지는 것은 정신의 원숙, 언어의 원숙미, 끈기 있는 관조정신이다.

푸른 이끼가 비단천을 이루는 집, 윤선도의 고택을 바라보면 시(詩)와 혼이 걸린 듯하다.


고운석 주필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기사 목록     프린트 화면     메일로 보내기     뉴스 스크랩    


굿뉴스피플 만평
<교육칼럼> 또 하나의 경로석
돈, 박물관이 코인을 만난 세상
<청강의 세상이야기> 왕이 후궁에게 교…
왕이 교접의 법도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고 하문하자 후궁이 대답한다. 평소에 단련…
<우수 농협을 찾아서> 신안…
신안 임자농협 주광옥 조합장은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 사람/공무원 화가 윤창숙씨
만화를 활용한 지방자치단체의 홍보기법과 효과 등을 종합 분석한 을 펴내 관심을 모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