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16)/ 睡隱 姜沆 | 임란 때 항거하다 4년 포로 생활
적지서도 꿋꿋이 '조선 정신' 심어줘
귀국해선 교육·저술로 强國 건설 실천 | | | | 입력시간 : 2008. 03.27. 15:57 |
 | | 강항선생 영정 |
|
역사를 땅에 묻고 역사 인물을 매장해놓은 채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을 꿰뚫는다는 건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
우리가 그랬다. 한을 품고 지하에 영원히 잠들어 있는 그 시대 그 인물을 고통 속에 가둬둔 채 역사의 강을 건넜다. 수백 년 전일 망정 그 시대의 아픔을, 그 아픔의 시대를 산 역사의 증인으로 오늘에 바로 세워 조명해보는 것은 '오늘'과 '내일'을 똑바로 걷기 위한 잣대가 아닐까.
그동안 역사의 안개 속에 뿌옇게 가려져 그 업적이 희석됐던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이 우리 앞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년 전의 일이다. 1993년에야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잡혀가 일본 주자학의 비조가 된 선생의 업적을 새긴 비가 영광군 염산면 하논 부락에 세워져 일본과 학계의 관심을 모았고, 92년 말에는 일본에서 '유학자 강항과 일본'이라는 연구서가 출간돼 그의 위치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1567년 영광군 불갑면 유봉에서 태어난 강항은 특이한 자질이 있고 기억력이 뛰어나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유년 기록이 있다. 9세 때 '천성부'를 지어 문장으로 유명해졌다. 16세에 향시에 합격해 1588년 진사가 되었고, 1593년 27세 때 문과에 급제해 이듬해 봄에 교서 정자가 되었다. 1579년 공·형조 좌랑으로 승진, 그 봄에 휴가를 얻어 고향 유봉에 와 있다가 정유재란이 터지자 분호조참판이 되어 전라도 군량미 수송 책임을 지게 되었다.
때마침 전세는 불리해 7월에는 한산섬의 관문이 무너지고 8월에는 호남의 중심인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에 돌아와 김상준과 더불어 여러 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모여든 수백 명의 오합지졸들은 왜군이 육박해온다는 소문을 듣자 모두 흩어져버리고 왜군은 영광군 근경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대비책이 없었던 영광의 전세는 불리했다. 9월 14일, 왜군에 의해 영광이 불바다가 되자 수은은 염소 당머리에서 바다로 탈출, 이순신의 진영으로 합류하려다 왜적에게 붙들렸다. 이때 수은을 붙잡은 자는 일본 이요노카미 사오토 부하 신시치로. 전란을 피하기 위해 아군의 해진을 찾아가다 왜적의 포로가 되자 형제자매들과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왜군선에 옮겨진 수은은 장인이 결박을 풀어주어 밤중에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왜병들이 날쌔게 건져내 통밧줄에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됐다. 이때 수은의 혈육으로 하나 뿐인 아들 용과 첩의 소생인 딸 애생이 배 안에서 수중고혼이 되었고, 첩도 이에 침식을 잃고 분해하다 끝내 세상을 등졌다. 또 종형의 아들이 배탈이 나자 왜병은 그 아이를 산 채로 물 속에 던져버렸다. 창자를 에는 아픔이 계속됐다. 그때 지은 시는 초토화된 조선의 설움을 토해내고 있다. <아득한 바다에 달빛 어린 밤이어라/ 눈물 섞인 찬 이슬에 옷깃이 젖네/ 넘치는 물결은 임 그린 눈물인가/ 별아! 너만은 알리라 서러운 이 맘을>. 생포된 지 9일 만에 왜선은 순천 좌수영에 이르러 큰 군선에 옮겨 일본 압송길에 올랐다. | | 내산서원 |
|
닥치는 대로 죽이는 판국에서도 벼슬아치나 기술자만은 어떻게든 살려서 본국으로 데려갈 심산이었다. 순천항을 떠난 지 8일 만에 배는 일본 이요에 입항했다. 이곳에서 오사카에 옮겨지고, 얼마 후 수도 교토에 들어가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제했는데, 그중 일본 주자학파의 선구자로 일본 유학사상의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한 후지하라와 깊은 교제를 갖기 시작했다. 후지하라는 본래 조선으로 유학을 오려다가 전란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유학의 대가인 수은을 만나 단박에 심취, 스승으로 모신다. 일본 주자학의 계통은 이퇴계→강항→후지하라→야마자키로 이어지고 있으니, 한갓 포로로 간 수은이 일본에 남긴 학문적 유산은 지대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로생활을 하면서 일본의 지도와 견문을 샅샅이 적어 비밀리에 인편을 통해 우리 조정에 보내니, 선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비변사에 비치했다. 1600년, 마침내 수은은 일본 류우노의 성주 아카마쓰의 힘으로 괴로운 포로생활의 막을 내렸다. 정유재란 발발 4년 후 4월에 다른 포로 30여 명과 함께 풀려난 수은은 5월께 고국 땅을 디뎠다. 고향에 돌아오자 곧바로 순천 교수직에 임명되었으나 많은 죄를 지은 몸이라고 극구 사양, 여생을 영광에서 밭갈이와 독서로 보내다 1618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영광군 불갑면 유봉에는 수은을 추모하는 내산서원이 세워져 오가는 이들의 발길, 눈길을 잡아매고 있다.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고 이을호 박사는 「간양록」을 번역하면서 '그의 수난의 기록을 통하여 고국을 향한 피눈물 고인 회포를 읽으면 목이 메이고 가슴 아픈 구절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민족의 수난기에 높은 학문으로 자신과 국가의 자존심을 세운 영광 선비 강항의 족적이 임란 415년이 지났지만 선명하게 보인다. 과연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일본을 미리 알았던들 외침을 당했을까. 이점에 대해 수은은 똑똑하게 얘기한다. "임진왜란 전에 우리의 지도자들이 안으로 당파 싸움에 혈안이 되고 밖으로 외국, 특히 왜인 실정에 너무도 캄캄하였기 때문에 그런 혹독한 화를 당한 것이 아니냐." 덧붙여 임금에게 일본의 군사체제, 경제구조 등을 상세히 적어보내며 '비록 왜놈의 제도라 하더라도 언제나 군율이 짜이고 훈련이 버젓하기 때문에 힘이 자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간곡히 조선의 실상을 간언한다. 수은은 일본에 대한 울분을 뛰어넘어 고차원적인 방법의 교화를 택한 것이다. 어쨌든 멀고 먼 바다를 지나 조국에 돌아온 수은은 '국민 교육 진흥'을 역설하면서 향리에 은둔한다. "아아! 대개 시험삼아 논하건대, 난세엔 무(武)를 숭상하고 평세엔 문(文)을 숭상한다는 말은 평범한 사람들이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팔도가 잿더미가 되고 빈주먹이 난무하는 사회, 백성들은 달려와 관리들의 의무를 묻는다. 이제 나라를 지키는 윤리와 의리, 속을 채워서 긴 창, 날카로운 칼을 피하지 않는 백성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국가를 위해 할 일은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라 앞날을 위해 교육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은 그는 교육활동과 함께 저술에도 진력, 「운제록」 「건차록」 「강감회요」 「좌씨정화」 「문선산주」 「수은집」 등을 남겼는데, 현존하는 저작은 영광 내산서원에서 1917년 간행한 「수은유집」 1권과 「운제록」 「문선산주」 필사본이다. 특히 「수은집」에 실린 수은의 시 180수를 보면 문학성이 뛰어난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풀리지 않은 정신적 고뇌, 절망과 좌절을 표출하고 있다. <소를 죽여 소 등에 싣고 오니/ 소 또한 음매 하며 슬퍼하네/ 어찌하여 금세(今世)의 선비들은/ 동류끼리 서로 죽이는고?> 벼슬아치들이 당쟁을 일삼아 서로를 모략 살상하는 세태를 통렬히 비판하는가 하면, 포악한 개가 방자하게 횡포를 부려 술집을 망쳐놓듯 권신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는 정치현상에 대한 비탄의 시를 쓰기도 했다. <마음 아픈 것이 어찌 술집의 개뿐이랴!/ 나라에도 미친 개가 있어 서릿발같은 이를 가네/ 벼슬길 갈 때마다 짖는 소리 많으니/ 대낮에 고기를 다투어 어찌 그렇게 시끄러운고?> 술집의 나쁜 개를 나무라면서 조정의 횡포한 무리들을 은근히 풍자하더니 더 이상 자제하지 못하고 '나라에도 미친 개가 있다'며 폭로하더니 결미에선 '그 놈의 가죽을 벗겨서 베고, 고기를 씹고 싶다'며 격렬한 분노의 외침을 토해낸다.
한데, 이렇게 극렬하게 실천한 선비를 기리고자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에 세워진 내산서원이 찾는 이가 드물어 그 빛나는 「간양록」조차 초야에 묻혀 말이 없다.
고운석 주필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
|
 |
|
기사 목록 
프린트 화면 
메일로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