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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선비정신을 찾아서…<22> 忠將公 金德齡
무등산이 낳은 憂國 열혈남아
壬亂 와중에 모함 받아 獄死
현종이 伸寃…그러나 미완의 명예회복
입력시간 : 2008. 10.01. 13:27


김덕령 장군 묘소
가을바람을 타고 무등산 사나이를 만나러 충효동에 가면 충장공 김덕령(忠將公 金德齡, 1567∼96) 장군의 사당이 못다 핀 충절을 품고 나타난다.

충장공에 대한 평가는 「실록」 「설화」 「야사」로 전해오는 얘기가 각기 다르다. 당시는 왜놈들이 몰려온 처참한 전쟁 상황이었고 유능한 인재가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기 때문에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영웅으로 떠올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장공은 광주가 낳은 인물로 가장 많은 신화를 내놓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옛날에는 석저촌이라 불린 그 아랫마을 탯자리의 신령스런 분위기에서도 단박 느껴진다.

김덕령은 1567년에 출생, 어려서부터 형 덕홍과 함께 대학자인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어 수학했다. 1592년 25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킨 제봉 고경명을 따라 형 덕홍과 함께 전주까지 간다. 그러나 노모와 어린 동생을 돌보라는 형의 권유로 귀향한다. 그 때 형은 고경명의 참모로 금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순국한다. 이듬해 8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후 주위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기병 권유를 받았으나 응하지 못하다가 형조좌랑으로 임명받아 상복을 벗고 담양에서 5천 명을 모집, 전투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전시 상황은 김덕령이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여 왜적과 싸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명나라에 의해 일방적으로 왜와 화의가 진행돼 급기야는 명의 주장으로 전투 중지령이 내려져 많은 의병이 정세만 관망하고 있었다. 또 의병들 가운데는 적당히 때만 넘기려는 누락자가 상당수 있었고, 군량과 병기가 부족해 사기는 저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덕령은 진주에서 전쟁 준비를 마치고 싸우겠다고 요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적군을 눈앞에 두고도 싸우지 못하는 울분과 점점 불리해지는 주위 여건을 쇄신시키기 위해 그는 군법을 엄하게 세웠다. 한번은 태만한 역졸을 죽이고 도망간 군사 대신 그의 아버지를 잡아와 치죄하려 했는데 그 군사는 윤근수의 노비였다. 마침 남방을 순시 중이던 윤근수가 이를 알고 김덕령에게 석방 요청을 했다. 그러나 김덕령은 그의 요청을 응낙하고서도 윤근수가 돌아간 뒤 그 노비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윤근수는 "김덕령은 신의가 없고 살인을 좋아하며 장수의 자질이 없는 자"라고 모함,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후 곧 풀려났으나 이 일로 김덕령에 대한 조정의 기대와 평가는 부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충장사 편액


김덕령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청양·대흥 등지를 함락시키고 덕산까지 침입, 세력이 점점 커지자 권율이 토벌군을 거느리고 이산으로 향하면서 김덕령에게 영남에 있는 항복한 왜군을 이끌고 오게 했다. 그런 이몽학이 민심과 군사를 모으기 위해 "김덕령 등이 이미 우리편에 가담했으며 병조판서 이덕형이 내응하기로 했다"는 소문을 냈다. 이 소문에 따라 김덕령과 사이가 안 좋던 이시언이 조정에 밀고하는 한편 심복 10여 명을 각지로 보내 김덕령이 이몽학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때문에 김덕령은 억울하게 권율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을 당했다. 여덟 차례 심한 고문을 당한 나머지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온몸이 부서졌다. 무죄를 끝까지 주장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진술을 이렇게 했다. "신이 만약 다른 뜻이 있었다면 당초에 도원수의 명을 받고 어찌 운봉에 갔겠으며, 또한 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의 진으로 돌아왔겠습니까? 신에게는 만 번을 죽더라도 면치 못할 죄가 있나이다. 그것은 자모가 별세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을 벗어 던지고 칼을 들고 나섰으나 여러 해 종군하여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충성도 이루지 못하고 효도마저 어겼습니다." 이 주장에 선조는 더욱 노하여 반역죄가 아니더라도 살인죄만으로도 형을 받아야 한다며 용서하지 않았다.

충장공 영정
김덕령은 심한 고문을 당한 데다 그의 용력을 의심하여 큰 나무토막을 묶어 옥문을 출입토록 하여 결국 형장 아래서 29세라는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 후 현종 2년 신원되었으나 완전 회복된 것은 아니다. 김덕령은 온전히 평가되기 위해서는 억울한 죄목을 얽은 당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민중 차원의 역사의식은 주로 구전된다. 또 그 구전은 후일 관심이나 의식이 있는 문인에 의해 문헌으로 기술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서술자의 주관, 개인 정서가 삽입되기도 한다. 이런 문헌 설화는 역사적 사실과 상이한 점이 있다하더라도 민중의 의식이 깃들어 있어 역사기록 이상의 가치가 있다. 김덕령에 대한 설화 기록이 그렇다. 워낙 위정자들로부터 모함을 많이 받은 사람인지라 민중들의 안타까움이 컸고, 민중들의 입, 글을 통해 명예가 다소 회복되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비극적인 무등산의 아들 김덕령, 그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대개 허위가 많다. 그와 관련된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은 민중, 광주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역사 현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지 표출이 아니었을까. 설화에서 김덕령이 충보다 효를 선택한 것, 이여송이 당할 수 없는 왜장 조섭을 퇴치한 것, 일방적으로 사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어주고 그 대가를 받아낸 것 등은 부조리한 역사 현장에 대한 민중의 비판과 저항 의지로 풀이하는 학자들이 많다. 김덕령이 펼칠 수 있는 가능한 세계를 상상으로 펼쳐 얘기함으로써 핍박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묘에서 출토된 충장공의 백무명 솜옷


무등산 자락 충장사.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임란 때 입었다는 백무명 솜옷을 보고 내려오면서 싸움 중 전투 중지령이 내려지자 울분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 지었다는 시 한 수를 읊어본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불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비극적인 그의 삶을 암시해 김덕령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입으로 전해온 얘기 하나는 이렇다. 중국의 한 명사가 천하명당을 찾아다니다가 중국에서는 찾지 못하고 무등산에 와 비로소 천하명당을 발견하고 김덕령의 부친 집에서 하룻밤 유숙한다. 중국의 명사가 밤중에 김덕령의 부친에게 계란을 하나 달라고 하자 이상히 여겨 삶은 계란을 주고 동정을 살핀다. 중국 명사는 삶은 계란인 줄 모르고 산에 묻고 나와 기다리다 새벽이 되었는데도 닭울음소리가 나지 않자 다시 하나를 더 달라고 한다. 이번에는 생계란을 주자 같은 장소에 묻고 온다. 다음날 새벽에 닭울음소리가 그곳에서 나니 명사는 과연 그곳이 명당이라며 중국으로 부친 묘를 파러 간다. 김덕령의 부친도 그곳이 천하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명사가 돌아간 다음 자기 부친 묘를 옮겨 쓰는데, 그 안에서 석회암이 나오자 그것을 들어내고 쓴다. 중국 명사가 1년 후에 와서 그것을 알고는 묘의 임자가 따로 있었다고 포기하면서 석회암을 들어낸 것은 큰 실수였다고 했다. 그것으로 인해 김덕령의 부친은 딸을 먼저 낳고 덕령을 낳았는데, 둘 다 장사였지만 누이의 용력이 덕령을 능가했다. 이 얘기는 중국에 대한 선민의식이 내재돼 있지만 대대로 내려온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을 다소 극복하고 있다. 명당을 무등산에서 찾은 점, 김덕령의 부친이 차지한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석회암을 들어내는 실수를 범해 덕령을 뒤에 낳게 된다. 때문에 누이는 조선과 같이 폐쇄된 사회에서는 김덕령이 천하제일의 용력을 지니지 못한 것 이상으로 비극이 전제되어 있다. 얘기가 더 진전돼, 그 비극은 다음과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덕령이 힘 자랑을 너무 하고 다녀서 누이가 항상 근심하며 자중하라고 타일렀으나 덕령이 듣지 않았다. 씨름판에서 덕령을 당할 자가 없자 자만해 있는 걸 알고 누이가 남장한 채 나가 덕령을 이겼다. 그러자 덕령은 세상에서 자기보다 힘센 이가 있다고 좌절하였다. 누이는 좌절하는 동생을 보지 못해 목숨 건 내기를 자청해 일부러 져주고 동생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누이를 죽인 김덕령은 결국 역사 현장에서 뛰어난 자신의 용력 때문에 시기하는 무리들로부터 모함을 당해 원사했다. 그의 누이는 아마 김덕령의 자만이 자초할 미래를 근심한 듯하다. 이 얘기에서 누이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해 동생을 구원함으로써 남성 위주의 조선 사회가 안고 있는 신분제도를 극복할 수 없었던 여성의 좌절과 한계성의 상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김덕령의 용력을 부각했다기보다는 현실사회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더 강하게 내포한 듯 하다.

우리의 미완의 영웅 김덕령이 묻혀있는 무등산 둔덕을 오르면서, 이 시대 광주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는 정신적인 기저는 뭘까 생각해본다.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 관운장 같은 용맹을 가지진 않았어도, 무등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고운석 주필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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