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5일(일)
HOME 커버스토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국제 스포츠 여성.가정 건강 이웃 전국

이동하기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32>/ 旅菴 申景濬
"개인이 민주화되어야 사회 민주화"
오늘의 정치권 준엄히 꾸짖는 듯
18세기에 행정구역 개편 주창한 先覺
입력시간 : 2009. 07.23. 23:54


생전에 여암과 가장 절친했던 홍양호의 묘비
한국 사상에서 실학사상의 온상이라 볼 수 있는 호남지역에서 태어난 실학자 중 한 사람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1712~81)은 「정훈록서」를 지어 사회 민주화를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이 민주적이어야 함'을 신신당부, 오늘날 여·야 정치권을 보고 말한 듯 하다. 그는 18세기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아버지나 스승의 뜻을 저버린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사람이 도리를 알면서도 끝내 행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일까? 여암은 만일 자기 주위에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갖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길을 밟는 자가 있다면 조롱하고 비웃으며 미워할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보살펴 모든 잘못에서 벗어나도록 힘써주는 것이 도리라고 강조했다. 모든 개혁이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므로 모든 인간이 정심(正心)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우리들 인생에 있어서 도(道)의 움직임은 곧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모든 철학자의 통념으로 되어있고 보면, "정도란 곧 정심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 여암의 논리는 일견 설득력이 있다. 세상만사가 정심하면 그릇될 리 있겠는가? 평범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 철학은 69년을 산 그의 전 생애에 짙게 깔려있다.

세조 때의 신숙주 후손으로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산대에서 태어난 여암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했으며 사람됨이 깊고 침착했다. "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천하의 일이 모두 나의 일이니 일물(一物)이라도 이치를 연구하여 궁극에 도달하지 못하면 수치요, 일예(一藝)라도 능하지 못하면 병이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며 성인의 글을 깊이 탐구하여 큰 뜻을 얻고 구류이교(九流二敎) 노자와 불교의 학설에 정통했으며, 해외의 기벽한 글, 조선의 산천지리에 밝았다. 26세에 소사(素沙)로 이사하여 소사문답을 쓰고 29세에 직산으로 이사해 직서를 쓰기 시작했다. 33세에 순창으로 다시 돌아와 향시에 응했으나, 우연히 지리산을 유람하여 즐기다가 회시에 응하지 못했다. 1754년 여름 증광시 문과에 뽑혀 승문원에 들어 휘능별검에 이르고 성균관 전적에 올라 다시 병조랑으로 옮겼다. 6년 후 사간원 정언을 제수 받고 1762년 봄, 서산군수로 나가 큰 흉년을 만났을 때 창고를 풀고 소금을 구워 조와 바꿔서 굶주린 사람 구휼에 대비하여 온 경내가 유랑하고 주린 사람이 없었다.

여암은 정사를 행함에 있어 안으로는 밝고 밖으로는 관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간사한 행위를 굴복시키곤 했다. 하루는 관아에 앉아서 군교에게 "어느 쪽으로 몇 리를 가면 숲 속에 도둑이 지나가는 사람을 막을 것이니 내일 아침에 잡아오너라" 했다. 군교가 여암의 말대로 도둑을 잡아왔고, 근세에 이곳 현에 거한 자 중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전하는 말로는 관아 뒷산에 투장한 사람이 있어 이로 인해 관아에 해가 많았는데 끝내 그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여암이 직접 사흘 밤을 지켰으나 소득이 없었다. 드디어 여암이 부교에게 명하여 산길에 엎드려 있게 하고 "들것에 관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묻지 말고, 다만 그자가 누구인가 염탐하라"고 했다. 과연 들것이 지나는데 그는 이 고을의 교활한 아전이었다. 그 광(壙)을 본즉, 두 번 파헤친 양쪽의 사이에 있는지라 읍 사람들이 모두 신처럼 여겨 복종했다. 이후 승정원 좌승지, 강계부사 등을 지내고 병상에 누운 지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평소에 지우들에게 맹자의 말 '마음을 맡은 것은 생각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와 관자의 말 '생각하고 생각하면 귀신도 통한다'는 내용을 자주 얘기하면서 '학문의 귀함은 도를 봄에 있고 도는 스스로 얻음에 있다'고 믿은 선비였다.

최근 거세게 일고 있는 행정구역 개편 논쟁이 18세기에도 불같이 일어났다. 여암은 일찍 조선 백성의 생활과 맞지 않는 행정구역에 불만을 갖고 그 대안을 도로고(道路考)에 상세하게 제시한 바 있다. 그는 18세기 조선의 주·부·군·현이 토지제도와 균형이 맞지 않아 크고 작은 것이 서로 다르고 길고 짧은 것이 기준을 잃어 주·부·군·현의 경계가 어긋나고 섞여 십리 안에서 타지방의 경계가 있거나 몇 고을을 넘어가도 서로 연접하지 못해 임금의 명이나 부역을 시킬 때 균등하지 못하고 폐단이 많다고 지적했다.

여암의 사상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로, 후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인다. 또 벼슬아치로서 많은 치적을 남기면서도 권문 귀족에게 아첨하지 않은 강직함을 보였으며, 학행이 부실한 사람과는 교유하지 않았다. 그가 오직 교유한 이는 홍양호로, 30년 지우였다. 홍양호는 「여암유고」 5권에서 "우리나라 학자들은 대개 견문이 좁아서 겨우 옛것을 흉내내기에 그치는데, 오직 여암만은 뛰어난 재주에다가 널리 배우고 모든 이치를 깊이 깨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기의 새로운 주관을 확립한 세상에 드문 훌륭한 학자다"고 말했다. 이들의 관계는 홍양호가 1754년 호남지방 향시를 맡아 관장하게 되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여암만 얻으면 큰 성공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여암 철학의 전박적인 특징은 역(易)사상과 유학의 기(氣)철학적인 입장에 기본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오직 거기에만 머물러 문약에 흐르는 공론에 빠지지 않고 실사구시, 이용후생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으로 진일보한 점이 돋보인다. 여암의 철학과 사상이 집약된 소사(素沙)문답의 핵심은 도다. 여암은 도를 모든 존재의 절대중심자로 보고 세상만물의 모든 존재 속에 도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정도란 곧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겠다. 물질적인 형색을 정심으로 보지 않으면 심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형을 바르게 보려면 먼저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외적인 색상에 구애되는 물욕을 버리게 되고 마음의 허(虛)를 가지게 된다. 이 허심에서만이 진실을 보게 된다. 도의 근원에 돌아가서 만물을 참되게 보고 참되게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고운석 주필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기사 목록     프린트 화면     메일로 보내기     뉴스 스크랩    


굿뉴스피플 만평
<교육칼럼> 또 하나의 경로석
돈, 박물관이 코인을 만난 세상
<청강의 세상이야기> 왕이 후궁에게 교…
왕이 교접의 법도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고 하문하자 후궁이 대답한다. 평소에 단련…
<우수 농협을 찾아서> 신안…
신안 임자농협 주광옥 조합장은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 사람/공무원 화가 윤창숙씨
만화를 활용한 지방자치단체의 홍보기법과 효과 등을 종합 분석한 을 펴내 관심을 모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