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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34> 녹두장군 全琫準
1857년 전북 태인에서 출생
조병갑이 아버지 杖殺하자
"虐政에서 농민 구출" 결심
輔國安民 바탕 사회개혁 이끌어
체격이 왜소해 '녹두' 별명 얻어
입력시간 : 2009. 10.04. 21:25


전봉준 장군 동상
전봉준(1857·철종5~1895·고종32년)은 조선 고종 때 동학혁명의 지도자로,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신이다. 아버지 창혁은 고부군 향교 장의를 지낸 선비였으나,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봉준은 이로부터 정부에 대해 원한을 품고 봉건 악제 밑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을 구출하려고 결심하였다. 한데 몸이 왜소하여 흔히 녹두라고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

봉준은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을 배웠으며,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 산외리 동곡마을로 옮겨 자리를 잡았을 때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 전답을 경작하기도 했으나 농삿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했다.
사발통문


그러다 1890년 35세 전후해 동학에 입교, 얼마 안 돼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나갈 수 있었다.

농민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의 서질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동지 20여 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천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보고를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이때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 주력부대는 백산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살해를 일삼자 다시 동학농민군은 봉기하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여기서 동도대장에 추대되었다. 이로써 민란은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화되었다. 1894년 4월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 중 황토현에서 영군을 대파하고 이어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 영광-함평-무안 일대로 진격하였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압송당하는 녹두장군


이에 앞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외병 차입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 요청으로 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조선에 진출해왔다.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 휘하 10여만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 휘하 10여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은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전봉준은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도-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한겨울이던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이 끝난 뒤 재판이 끝나자 교수형에 처해졌다.

지금은 전봉준을 숭배하고 '동학혁명' 사상을 기리고 있는데, 올해도 동학농민혁명의 자주와 평등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하고 무장기포를 기념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 제115주년 축제가 지난 4월 25, 26일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기포지를 비롯한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열렸다. 이강수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은 "1894년 음력 3월 20일(양력 4월 25일) 공음면 구수마을에서 동학농민군 4천여 명이 모여 무장포고문을 반포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지역의 봉기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농민봉기로 출발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면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이며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인 무장기포지 등 많은 유적을 간직한 고창에서 축제도 참여하고 역사의 발자취도 느껴보게 했다"고 말했다.





고운석 주필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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