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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38> 茶山 丁若鏞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 꿈꿔
"官에 항의할 줄 아는 사람 포상해야"
학문으로 병든 사회 치유하려 애쓴 사람
500여 권 저술…조선 500년 최고 지식인
입력시간 : 2010. 02.04. 21:07


지난해 4월 새로 제작된 다산 영정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지만 1801년 전남 강진에 유배되어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이나 저술해 이곳 출신처럼 알려진 인물이다. 대한민국 역사 인물 중에서도 다산만큼 매력 있고 가깝게 느껴지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해박한 민중사관으로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얘기했으니, 요새 우리가 앓고 있는 총체적 고통을 미리 알았던 인물이다. 민중에 대한 애정을 기본으로 실학사상을 편 다산. 많은 문제를 안고 21세기를 향해 걷는 우리의 철학, 우리의 자세에 정신적 재충격을 주는 다산학을 새겨야 한다.

노사 기정진 선생이 부패한 정권을 꼬집으며 임금에게 이런 상소를 올리지 않았던가. "지금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 모순을 해결하려면 다산의 목민심서를 읽으십시오. 백성이 당하는 고통이나 나라가 병들게 된 근본 이유가 모두 이 책 안에 있으니 이걸 읽고서 구제책을 세우십시오." 노사는 다산의 목민관(통치자)을 크게 신뢰했던 것이다. "목민관이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태어났는가. 백성들은 곡식과 옷감을 공출하여 자기들의 목민관을 섬기고 고혈과 진수를 다 바쳐서 그들의 목민관을 살찌게 하니 백성들이란 목민관을 위해서 태어났단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목민관이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목민관의 허세와 폭력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목민관이 누구를 위해 있는 사람이고 누가 만들어줬는가'를 새삼 일깨웠겠는가.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자가 지켜야 할 몸가짐을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단정한 몸가짐, 청렴한 마음, 가정을 다스림, 청탁을 물리침, 아껴 쓰기, 베풀기를 좋아하기다.

200여 년 전 강진을 중심으로 실(實)의 문화운동을 편 다산의 행동에 동의하는 현대의 광주사람들이 모여 만든 '다신계 헌장'은 200년을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다산사상의 맥을 느끼게 한다. 고(故) 이을호(李乙浩) 박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다신계 헌장'은 '인간의 진실된 마음으로 수기(修己)하고 성실한 행동으로 치인함으로써 날로 새로워야 할 세태를 직시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맑고 밝게 영위하기를 염원하는 동지들과 함께 자연과 미와 인간과 선과 우주의 진(眞)을 하나로 묶어 풍요로운 삶이 되도록 실질적인 신문화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결사한다'고 되어 있다.

조선 후기를 산 다산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하던 환난의 시절, 제3기는 경기도 광주(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돼 줄곧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시절로 암행어사, 참의, 좌우 부승지 등을 거쳤다. 이 시기 그의 학문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다.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고, 23세 때는 서양 서적을 구해 읽기도 했다. 이때의 서양 서적은 천주교 서적으로, 6~7년 동안 다산은 천주학에 매료되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다산에게 시련이 닥쳤다. 다산의 셋째형인 약종이 주선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밀입국시키다가 발각되자 다산까지 오해를 받고 충청도로 유배에 가까운 좌천을 당한다.
여름철 다산초당
얼마 뒤 다시 벼슬길이 열렸으나 반대파의 상소로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임명됐다.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 지방관으로 득의의 시절의 끝이었다. 제2기는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정조 사후 책통 사건으로 체포·투옥됐다가 1년 후 포항으로 유배, 다시 강진으로 이배됐다. 강진 동문 밖 주가에서 4년간 거쳐하면서 고적한 생활을 하던 다산은 1803년 만덕사 소풍 길에서 해장선사를 만나 유불 상교의 기연을 맺고 집필을 계속하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겨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주역상전」 「상례사전」 「시경」 「춘추」 「흠흠신서」 등 6경 4서와 1표 2서를 완결지었다. 귀양에서 풀린 3기는 회갑 때로 「자차묘지명」을 저술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이후 총 500여 권을 저술했으니 놀라울만한 지성이다. 다산은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열심히 산 선비다.

36세 곡산 도호부사 시절의 정치는 놀랍다. 바로 '이계심 사건'인데,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1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관아에 쳐들어와 시위를 주동했던 이계심이라는 백성을 무죄 석방한 사건이다. 수령이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백성들이 제 몸의 안일만 꾀하느라 수령의 잘못을 지적해주지 않기 때문이라 판단, 치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항의하는 백성에게 잘못이 없다는 다산의 민권의식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백성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관에 항의할 줄 아는 사람은 오히려 상금을 주어 포상해야 한다고 했으니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역사의 흐름을 탔다. 안일과 안정, 현상유지만 바라지 않고 변혁과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한 사상가였다. 200년 후 오늘, 우리가 그를 재음미하면서 기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산학의 대가인 이을호 박사는 "군자학이 되려면 수기만 해도 안되고 치인만도 있을 수 없으니 다산학의 근본정신은 목민지도에 있다"고 강조하고 "목민지도에서 목민이 다산학의 눈이다. 여기서 다산학은 곧 인간학이 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다산을 근세 수사학파의 창시자로 본다. 다산은 수사학을 근세로 가져와서 새로운 하나의 학파, 개신유학을 이루었다는 평가다. 공자 이후 다산에 이르기까지 2천 년 세월 동안 유학이 엄청나게 변했다. 한나라 때 훈고학·과거학·술수학, 당나라 때 문장학, 송나라 때 성리학이었다. 그런데 한·당·송으로 이어진 것들을 전부 부정하고 공자학으로 다시 올라갔으니 당시 학계로선 놀랄 일이었다.

다산의 서학사상은 어떤가. 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다산의 천주교도로서의 활동을 살펴보면 짐작이 간다. 다산이 22세 때 겨울 북경으로 사신 임무를 맡은 아버지를 따라갔던 자형 이승훈이 이듬해 귀국했다. 그때 이승훈은 북경에 있는 천구교회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대한 여러 가지 서적이나 성구 등을 가지고 왔다.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세례인이 나오고 천주교 문제가 사회 표면으로 부상하던 때다. 그 해 다산은 큰형수 제사를 지내러 고향으로 가다가 큰형수 아우인 이벽과 동석했다.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배에서 이벽의 소개로 다산은 천주교 관련 서적을 읽었다. 기록에 따르면, 다산이 그 책을 읽고 '이런 세계가 있구나'라며 매혹되었다고 한다. 청년 다산은 23세 때부터 6~7년 동안 천주교에 매료됐지만 '신해사옥'이라는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생명 부지가 어려움을 느끼고 손을 끊었다. 그러나 천주교 관계자들은 이후 다산이 유배살이 하는 동안, 해배하여 타계할 때까지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고 종부성사했으며, 그의 사상에 서학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다산 연구가 박석무(전 국회의원)는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 다산이 일생동안 치력했던 저서는 「상례사전」과 「주역심전」인데, 이 예학과 역학은 천주교 신자로서는 연구할 수 없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산의 주저로 여기는 저서들이 모두 유배 후 저작된 것들이고 해배 후 다시 평생작업으로 정서한 것이니, 유배살이 때부터 다시 신자가 되었다느니, 해배 후 더욱 돈독한 신자가 됐다는 주장은 신빙키 어렵다는 것. 오늘날 다산을 최대의 학자니 최고의 사상가니 할 때는 실학사상 측면이나 경학사상 측면에서의 이야기이고 보면, 천주교 신자로서의 그의 사상과 철학은 거짓 주장으로 돌아가고 만다. 깊은 연구가 이뤄져 명백히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인간을 위한 학문, 인간을 위한 인간의 사상을 주장한 다산의 섬뜩한 지성은 오늘날 더 힘있고 꼿꼿하다.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다. 사람에 비유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속속들이 병들어 있다. 다산은 자신이 살고 있는 당시 사회를 중병환자로 진단했다. 그래서 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치료방법은 학문이었다. 다산의 시는 의사의 입장에서 진단된 다산 자신의 임상보고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에는 중병에 걸린 환자(조선)에 대한 병 증세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사회 구석구석의 병 원인이 되는 것을 예리하게 진단해 보고한다. 이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다산의 사회시다. <지난 봄에 꾸어온 환자미가 닷말인데/ 금년도 이 꼴이니 무슨 수로 산단 말인가/ 나졸놈들 오는 것만 겁날 뿐이지/ 관가 곤장 맞을 일 두려워 않네/ 오호라, 이런 집이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 다 살펴보랴.> 다산 시를 보면, 다산은 농민의 만성적 기아 원인으로 첫째는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을 꼽았고, 두 번째는 삼정의 문란을 틈탄 지방관리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지적했다. 셋째는 봉건적 신분제도·과거제도·적서차별·지역차별 등을 원인으로 제시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어명을 받들고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백성의 고난과 설움을 직접 느낄 수 있었고, 초라한 농가에서 뻗어나는 순박하고 정직한 백성의 이상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하늘이 내 뜻을 받아주지 않으면 내 저서를 불질러버려도 좋다'는 안타까움을 안고 눈을 감았다. 이 말은 후세인들에게 그의 사상을 꼭 구현해달라는 당부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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