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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을 찾아서…<51>/ 한국불교 새 지평 연 白龍城
용기+인내+신념+조국애의 인물
한용운과 함께 3·1운동 앞장
1년 반 옥살이서 한문 경전 번역 눈떠
기존 이미지 쇄신하려 '대각교'로 개칭도
입력시간 : 2011. 03.03. 14:55


백용성 스님이 태어난 마을
민중 속의 세존 찾기에 앞장선 백용성은 전남 보성 태생인 서재필보다 한 해 뒤인 1864년 전북 남원군 하반면 죽림리서 태어났다. 근대 한국 불교사에는 선구적인 대덕 소승들이 많지만 백용성처럼 다재다능한 이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는 선사(禪師)요 율사(律師)요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자요 포교자이면서 역경가이기도 했다.
백용성 스님 영정


시간을 거슬러 봄기운을 타고 남원군(지금의 장수군)으로 간다. 이곳에서 백용성은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 장자로 탄생했다. 어려서부터 종교적 소질과 인품이 뛰어났던 그는 14살에 남원 덕밀암을 찾았다. 바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부모는 달래고 야단쳐서 다시 집으로 데려왔으나, 그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2년 후 그는 결심을 하고 해인사 하월스님을 은사로 스님이 됐다. 일단 사미계를 받고 누더기를 걸쳤다. 깨달아야 할 것은 글자 그대로 '인생이 무엇인가'였다. 양주 보광사에 머물 때였다. '만물에는 근원이 있다. 사람은 무엇이 근원이며,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의심하며 고민하던 차에 불이 비치듯이 이치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 묘한 이치는 참으로 말할 수 없고 생각키도 어려웠다.

21세 되던 해 그는 마침내 비구가 되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이란 율사에게 비구보살 두 가지 계를 아울러 받게 된 것이다. 선곡율사에게서 계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나라 계맥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선곡은 근대 율종의 중흥종인 대은율사의 후예다. 따라서 백용성 또한 대은율사의 계맥을 계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구가 된 백용성은 보다 폭넓은 구도를 위해 길을 떠났다. 지리산과 송광사 등을 찾아다니며 참선과 간경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 후 금강산·도봉산·가야산·조계산 등 명산과 대찰을 역방하여 구도에 열중하다가 1904년 44세 때 만주를 거쳐 중국 본토에까지 갔다.
지난 2007년 3.1절 민족대표 33인의 영정을 들고 탑골공원을 돌아보고 있는 대각사 신도들. 백용성 스님도 당당히 여기에 포함되는 독립운동가다.


많은 중국 승려들과 만나고 4년 후 국내에 들어온 백용성은 서울에 부쩍 늘어난 교회를 보고 교당 건립에 앞장섰다. 1912년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여 통도사, 범어사 등의 연합으로 선종교당이란 건물을 세웠다. 3년여의 포교로 3천을 헤아리는 신도를 갖게 됐다. 실로 놀라운 불교의 발전이며 새로운 방향이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 사업을 위해 북청 탄광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사에 밝지 못한 스님인지라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한국 역사의 기념비적인 해 1919년. 그는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앞장섰다. 그 후 징역 1년6개월의 처형을 받았다. 그는 형무소를 수도처로 삼았다. 형무소 안에서 그는 중요한 발견을 했다. 어려운 한문 경전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출감하자마자 그는 번역사업을 시작했다. <인상록> <원각경> <능엄경> 등을 차례로 번역했으며 <심조만유론>이라는 단행본을 저술하여 반포했다. 무려 2만여 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과 번역을 했다. 백용성의 이 역경사업은 불교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획기적인 전환이기도 했다. 1926년 5월 그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건을 남겼다. 그가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던 '범계생활금지'에 관한 건백서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 승려들의 대처행위를 금지케 해달라는 탄원서인 것이다.

백용성은 한국불교를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고 섬겼다. 기존의 불교에 파묻혀 산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발전하는 불교를 생각했다. 낡은 전통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참신한 새로운 전통을 세워보려 했다.
백용성 스님 생가
수천 년 동안 외부 사회로부터 모멸과 천대를 받으면서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교단의 위신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 내용이나 제도가 시대에 맞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교의 인상을 탈바꿈시키기 위해 '불교'라 하지 않고 '대각교'라 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어느 저서를 보나 '세존'이라 하지 않고 '대각'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서울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하고 불교의 새로운 이념을 확립하려 하였던 것도 그 맥이 같다.

큰 용기와 신념과 인내와 조국애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시절을 높은 불교 정신에 지탱하여 꿋꿋하게 이겨낸 스님 백용성. 실로 한국 불교계의 중추적 역할을 민족운동과 함께 한 인물이다. 1880년 해인사 입문, 1919년 3·1운동 주도, 1920년 인상록, 원각경, 능엄경 번역. 저서는 「심조만유록」이 있는데, 양주 '보광사'와 서울 봉익동 '대각사'에 가면 지금도 그의 혼을 만날 수 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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