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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58>/ 姜宇奎 의사
"조선 청년들아, 깨어나라"
부임하는 日 총독에 폭탄
3.1운동 후 최초로 의열투쟁 감행에
“64세 노인이?” 젊은이들 깜짝 놀라
오늘 우리 교육열 있게 한 마중물 역할도
입력시간 : 2011. 10.02. 15:46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등 관계자들이 지난 9월 2일 오전 용산구 서울역광장 앞에서 강우규 의사 동상을 제막한 후 박수를 치고 있다.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슬퍼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에 세상에 한 일이 너무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나 죽는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백발의 노인은 자신의 죽음마저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민족혼을 심는 교육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간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이다. 그는 강우규 의사(1855, 철종 6~1920)다. 그의 자는 찬구(燦九), 호는 일우(日愚), 본관은 진주이다.

이런 그에게 3·1운동은 이 땅의 민초들에게 나라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한 이정표였다. 그들은 그 누구의 신민(臣民)이 아닌 공화제 민주정부를 세울 시민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은 젊은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의거 당시의 강우규 의사 사진.


그는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역(서울역의 전신)에서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 주인공이 백발노인임이 알려지면서 조선 청년에게 끼친 영향은 컸고, 이후의 의열 투쟁에 불씨가 됐다. 김익상·김상옥·나석주 등 의열단과 이봉창·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을, 아니 오늘 우리를 있게 한 동력인 교육열을 이끌어낸 한 바가지 마중물이 그의 의거였다.

강 의사가 재판 과정이나 수형 생활 중, 처형 직전 보인 당당한 모습은 그의 재판 과정도 운동의 연장선으로 삼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의거 보름 후 체포돼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1시간 동안 독립연설을 했다. 연설 중 숨이 찼던 강 의사는 "물을 줄 수 없느냐"고 해서 물을 마신 뒤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열변을 토했다. 일본 경찰의 증언록에 나온 내용이다. 공판 과정에서도 그는 당당한 기개로 소신을 피력했다.

그의 공판 소식이 처음 알려진 것은 우리민족지 1920년 4월 1일 창간호였다. 이어 사형이 확정된 5월 27일까지 14건의 기사에 공판 과정이 속속들이 전해졌다. 4월 16일에는 강 의사의 1심 최후 법정 진술이 실렸다. "사이토는 동양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이며 인도주의를 무시하는 사람이므로 죽이려 한 것이요. 검사의 말에 나를 매명한 이라고 하나 나는 죽어도 매명한이 아니오. 인도, 정의와 동양 평화와 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친 자요."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에 따르면, 강 의사는 1859년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해 한약방을 운영하며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 전파에 힘을 쏟았다.
강 의사가 처단하려 했던 사이토 총독.
성재 이동휘 집안과 인연을 맺으면서 구국운동론에 감화돼 민족교육으로 독립운동 일꾼을 양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듬해인 1911년 북간도 하룡현 두도구로 건너간 뒤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오가며 박은식, 계봉우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힘썼다. 강 의사가 유언에 조선 청년의 교육을 걱정한 것도 함경남도 홍원군 영덕리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것을 포함해 연해주와 만주 등에 6곳의 민족학교를 설립했던 경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920년 5월 27일 상고 기각으로 강 의사의 사형은 확정됐다. 같은 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는 66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2010년인 지난해가 강 의사 순국 90주년이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 9월 2일 의거일에 맞춰 서울역 옛 청사 앞 광장에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강 의사 의거 학술 세미나도 열었다.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이날 '강우규 의사의 생애와 의거' 기조연설에서 "강 의사는 우리 민족이 3·1운동을 통해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 의지를 밝혔음에도 일제가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한국민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해 의거를 감행한 것"이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일제에 커다란 경고와 응징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주제 발표문 '강우규의 계몽활동과 현실인식'에서 "노인으로서 그가 보여준 용기는 특히 청년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고, 이후 의열단 등 1920~30년대 국내외에서 가열차게 전개된 항일의열투쟁의 기폭제가 됐다"며 강 의사가 사이토 총독을 폭살하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사에는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양성숙 경찰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강 의사가 순국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담은 미국 일간지 로스앤젤레스타임지의 9월 4일자 삽화가 걸려 있다"며 "강 의사의 의거는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의미 있는 사건이고 이후 의열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말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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