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5일(일)
HOME 커버스토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국제 스포츠 여성.가정 건강 이웃 전국

이동하기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70>/ 黃丙吉 의사
훈춘 중심으로 행동으로 日帝 응징
많은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애국지사
세계 정세에 밝고 조직 규합력도 뛰어난 인물
입력시간 : 2012. 10.08. 17:28


지난 7월 2일부터 '대학생 중국 내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답사'에 참가한 대전 충남지역 대학생 37명이 4일 청산리대첩 유적지를 둘러본 후 중국 화룡시에 세워진 청산리항일대첩비 앞에서 독립혼을 기리고 있다.
조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모든 것은 조국에 속한다. 그런데 조국 광복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선열들이 많다. 그 중의 한 분이 황병길(黃丙吉) 의사다.

그는 우리 조국독립운동에 있어서 책략의 근원이 되는 곳이며 혈전장이기도 한 북간도에서 의병항쟁기로부터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대전투를 위한 무기 준비의 근거지인 훈춘(琿春)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훈춘은 러시아 영토인 포셋트 지방과 조국 땅 온성·경원군 등지와 인접해 있어서, 말이 국경이지 우리 독립투사들에게는 러시아로부터 무기 반입이며 본국으로부터 인원 지원 등을 위한 절호의 요지였다. 황병길 의사는 여기를 활동무대로 선택하고 싸운 것인데, 이범윤 간도관리사의 사포대원(私砲隊員)으로 출발하여 훈춘을 비롯한 한·중·로 삼각지대에서 항일(抗日)투쟁의 주도적 구실을 하다가 짧은 생애를 영원한 조국광복 제단에 바쳤다. 주로 훈춘 경계 내에 정착한 독립투사로서 황 의사와 혈맹을 맺은 동지(同志)이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지사(志士)들 중에 중요한 분들을 몇 분만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다. 양하청·최경천·강병일·한경서·이명순·채덕승·진학진·오주현 지사 등 모두 쟁쟁한 독립투사들이다.
북간도에서 한민족 교육의 심장 역할을 했던 대성학교.


황 의사의 행장을 차례로 개관하면, 그는 무후 선열로서, 투쟁경력은 문헌으로 또는 신빙할 수 있는 증언으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으나, 생년월일은 확인할 길이 막연하다.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범윤 관리사가 창설한 사포대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이 되므로, 그가 출생한 때는 1880년대 초로 추산이 된다. 이범윤이 1902년 구한국정부로부터 간도시찰사로 임명받고, 그 다음해 관리사가 되어 몽매(蒙昧)한 토민(土民)들에게 천대를 받는 동포들을 보호하는 수단은 무력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청나라 관청에 바치는 동포들의 각종 세금으로 사포대를 창설하고 400명의 장정을 무장시켜 위력으로써 오만불손한 토민들의 기를 꺾어서 동포를 보호하게 되었는데, 황 의사는 이 무렵에 관리사 이윤범의 신임을 받았으므로, 당시 그의 연령은 약 20세 전후로 추산된다.

그 뒤 로·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일제 무리는 그 세력으로 북간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러시아를 적극 지지하던 이 관리사는 일단 사포대를 해산시키고 부하들을 대동하고 훈춘에서 멀지 않은 국경 너머 노우키에프스크로 옮긴다. 여기서 토착실력자로 애국사상이 충만한 최재형 등 그곳 지사들과 제휴하고 대일무력항쟁을 서둘러 본국 북단인 경흥·경원·온성·종성 등지를 초기 전투지역으로 정하고 유격전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의 도래(到來)를 계기로 의병진을 강화하고 본격적인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황 의사는 능숙한 수단을 발휘하여 무기 입수와 의병 모집 등에 맹활약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항쟁을 속하는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전국의병항쟁이 내리막이 되어, 황 의사는 훈춘으로 돌아와 재기(再起)를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계획으로 군사교육에 치중하여 훈춘현 춘화향 사도구에 독립군양성소를 설치하고 200여 명의 청년을 훈련시켰다. 이와 함께 항일독립정신 고취에 주력하여 김관식·윤동철·박태환·한수현·여남섭·한형권·오현경 등 예수교의 신도들과 같이 한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세계 정세 추이에 민감한 의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제국주의 침략 하에서 다년간 신음하던 약소 민족들, 특히 당시 힘깨나 쓰던 동맹국 밑에서 시달려온 민족들의 독립운동은, 일본제국주의 밑에서 신음해온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에게서도 태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해 7월 청산리대첩 현장 답사에 나선 우리 젊은이들이 비를 맞으며 행군하고 있다.
황 의사는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등에 지고 두만강을 건너면서 오랜 시련을 극복하여 직접 행동으로 또는 실력 양성으로 발분망식하면서 활약해오다가 거족적인 민족의 대궐기가 일으켜질 것을 확신하고, 다년간 고난을 같이해온 동지 박치환·강병일 등 독립투사들과 무기와 자금 모집에 주력하여 군자금 25만 루블과 무기 300점 확보를 목표로 하고 활동하는 한편, 예수교 신도들을 격려하여 용정 서진평야에서 먼저 봉화를 들었다. 3월 13일 약 1만 명 군중이 모여 외치는 함성은 간도 산하에 메아리쳤다. 훈춘에서는 역시 황 의사가 중심이 되어 건국회의 조직을 통하여 각 학교와 연결을 취하면서 용의주도하게 동원태세를 갖추느라고 용정보다 1주일이나 늦게 궐기하였다. 서울에서 3·1독립선언이 발표될 때에도 황 의사는 솔선해서 국내 동지들과 연락을 취해왔는데, 온성군 참사 임도준과 연락을 취하며 거사 모의를 거듭하여, 단지 만세를 부르는 형식적인 시위운동에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서둘러서 수백 자루의 권총과 장총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 의사는 3월 16일 훈춘 시가로 들어와 궐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 영사관원에게 매수된 토민들이 황 의사를 살해하려고 하자 그들의 눈을 현혹시켜가면서 활동하였다. 황 의사는 노종환·강병일·양하구 등과 3·1독립선언 축하 민중대회를 1919년 3월 20일 열기로 결정하였다. 하여 20일 오전 6시부터 수천 군중이 모여 황 의사 지휘 하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단행하였는데, 일본 영사관원들은 황 의사를 체포 또는 암살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하였다. 하지만 재류동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애국투사 엄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으므로 황 의사는 적의 시선을 회피해가면서 더욱 격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황 의사와 이명순은 탑도구에서 회동하고 의혈동지인 강병일 지휘 아래 의사단과 최경천 부하인 포수단을 합하여 군무부라 개칭하고 군율을 제정하여 황 의사를 군무부장으로 추천하고 이명순·강병일·최경천 등이 대대장, 재무부장, 중대장, 기관총대장을 선임하였다. 당장 집합한 400명 대원을 일본의 탐사를 고려하여 남별리·이도구·두도구·삼도구 등의 부락에 분산시키면서 대기 중이었다. 같은 해 5월 16일 강석훈 이하 49명이 적 기관 파괴와 자금 및 대원 모집의 사명을 띠고 함경남북도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들 행선지에 대하여서는 군무부장 및 중견간부 외에는 절대 비밀로 되어 있었다. 황 의사의 조직은 이렇게 준비가 충실하였기에 독립군끼리도 서로 더욱 밀집하여서 행동 역시 대담하였다. 일인들의 거점을 수없이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황 의사의 업적이 어찌 여기에만 그치겠는가. 이렇다 보니 그가 순국한 연월일은 일제 측에서 기록하여 1920년 6월 1일이다. 장소는 훈춘현 엔퉁라즈였다. 왜놈들은 그가 병사했다고 하나, 살해된 것이라고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나 북간도에서 활동한 모든 지사들의 증언이 이구동성으로 왜놈의 흉탄에 맞아 순국한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의사의 순국 후 수천의 동포가 마저탑에 모여 장중하고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기사 목록     프린트 화면     메일로 보내기     뉴스 스크랩    


굿뉴스피플 만평
<교육칼럼> 또 하나의 경로석
돈, 박물관이 코인을 만난 세상
<청강의 세상이야기> 왕이 후궁에게 교…
왕이 교접의 법도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고 하문하자 후궁이 대답한다. 평소에 단련…
<우수 농협을 찾아서> 신안…
신안 임자농협 주광옥 조합장은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 사람/공무원 화가 윤창숙씨
만화를 활용한 지방자치단체의 홍보기법과 효과 등을 종합 분석한 을 펴내 관심을 모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