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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71>/ 추강(秋江) 김용무(金用茂)
역사의 소용돌이에 희생된 미군정 대법원장
머릿속엔 항상 민족의 독립…김병로 등과 정당 결성
철저한 반공주의자…6·25 때 납북돼 1957년 北에서 사망
입력시간 : 2012. 11.09. 11:49


올해 광복절에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진 태극무 공연. 김용무는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을 뚫고 우리 사법의 근대화에 일조를 한 인물이었다.
법 위에 사람 없고 법 아래 사람 없다. 어떤 사람에게 법에 복종하기를 요구할 때 우리는 그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법에 대한 복종은 권리로써 요구되는 것이지 특혜로써 부탁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데 우리나라 민초들은 법을 몰라 무조건 당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주변에 법을 좀 아는 이가 있으면 먼 길 마다않고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던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집안에 판사가 나오면 최고의 경사로 치고 법과대학 다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 대표적인 법조인 김용무는 우리나라 사법제도가 형성돼가던 시대에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1913년 메이지 대학 졸업)씨와 함께 법조계에 뛰어들어 법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초를 살았으니 세기 말의 아픔과 세기 초의 혼란을 한 몸에 받으며 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유학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필묵장사를 할 정도로 가정이 어려웠지만 21살 때까지 무릎 꿇고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댕기를 땋고 한복을 입은 시골 청년 김용무는 한일합방 이후 급격히 몰아닥친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들어가 법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15년 졸업을 하고 유학을 결심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1년여를 방황하다 영암의 대지주 현기봉(호남은행을 설립한 현준호의 부친)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 일본 중앙대학교에서 본격 법률교육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응시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자 그리운 고국 조선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용무의 머릿속에선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독립을 어떻게 앞당길 수 있을까가 항상 떠나지 않았다. '그래,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실력을 길러야 해. 실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다!' 그는 민족지 동아일보에 글을 썼다. <만고불변의 3육 지(智) 덕(德) 체(體)이나 빈(貧) 혈(血) 군(群) 구축이 첫째다. 따라서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체육이 더 필요하다>고. 그가 본격적으로 교육에 손을 댄 것은 1930년 초.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려 할 때 이사회의 감사를 맡아 나중에 재단이사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35년 6월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학생 정원을 초과했다고 해서 보성전문학교와 총독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사태 해결을 위해 김성수가 교장에서 물러나고 김용무가 대표이사 겸 교우회장, 보성전문학회장까지 겸하게 됐다.

그러던 중 우리 민족의 염원이던 해방이 됐다. 그리하여 우선 자신과 가까운 김병로·백관수·조병옥 등과 함께 정당 결성을 주도해 조선민족당발기인회를 구성하고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국민대회준비회의 통합정당인 한국민주당발기인회에도 심사부장으로 참여했고, 이후 문교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해 10월 미군정 대법원장에 임명이 되자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 시기가 추강 김용무의 인생 전반기 중 절정기라고 할 수 있다. 미군정 때 그가 맡은 직함은 조선변호사회 당연직 회장, 선거심사위원회 의장이었다. 당시는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극심했다. 김용무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혁의 물결 속에서 한민당과 미군정의 사법부에서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익 정치인으로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던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단독정부수립이 계기였다. 김용무는 인촌 김성수측과 가까웠고 이승만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곧 무소속으로 전남 목포지역 보궐선거에 출마하지만 아쉽게 30표 차이로 낙선하고, 1950년 거행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국당 후보로 무안(지금의 신안군까지 포함)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어 새로운 변호사법에 의해 창설된 대한변호사협회 초대 회장에 당선, 재기에 성공하지만 6·25한국전쟁이 발발. 허사가 되고 말았다. 김용무는 서울 만리동 집에 머물다가 피난길에 나섰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돼 성남호텔에 감금당한 후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공산주의에 철저히 반대했던 그는 북에서도 저항을 계속하다가 1957년 유언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나라가 없는 일제시대의 지식인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법치주의와 공산주의 반대에서 다시 평가를 받아야 할 요소가 많다. 김용무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롭고도 불행한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추강 김용무를 알기 위해 가볼만한 곳은 그의 고향인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다.



추강(秋江) 김용무(金用茂) 약력

1890년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출생, 1910년대 후반 일본 중앙대학교 법과 졸업. 1920년 고등문관시험 합격 후 변호사 개업. 1945~50년 미군정 대법원장과 2대 국회의원. 납북 후 1957년 사망.


고운석 주필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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