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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77>/ 신라 승려 혜초
한반도가 낳은 최초의 세계인
15살 때 중국 行…4년 동안 인도~아랍까지 섭렵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에 생생한 기록으로 남겨
"달 밝은 밤 구름은 고향으로 날아가네…" 선험자의 고독 읊기도
입력시간 : 2013. 05.14. 11:17


혜초의 행장을 재현한 캐릭터
역사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신라 승려 '혜초'라는 이름이 나오면 곧바로 '왕오천축국전'을 떠올린다. 그러나 혜초가 어떤 인물인지, 왕오천축국전에 어떤 내용이 실렸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혜초의 그 마음, 시공 넘어 우리 곁에 숨쉬고 있다.

1908년 2월 25일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중국 둔황(敦煌) 막고굴에 도착한다. 중앙아시아조사단을 구성해 중국 신장위구르 지역의 카슈가르에 들어온 지 1년 5개월만이었다. 펠리오의 머릿속엔 온통 둔황문서였다. 신장위구르에 머물 때 둔황 막고굴에 혜초의 흔적으로 보이는 고문서가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막고굴 도착 다음날부터 펠리오는 현지 조사에 착수했다. 곧바로 왕 도사를 만났다. 왕 도사의 이름은 왕원록. 1900년 둔황 막고굴로 흘러들어와 도사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막고굴 16굴을 청소하던 중 우연히 17굴 석실을 발견했다. 그 안에 3m가 넘는 높이로 무수히 많은 고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문서를 수장하고 있다고 해서 이 17굴을 장서동이라 부른다. 왕 도사는 일종의 관리인이다. 왕 도사를 통하지 않고는 둔황 문서를 만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펠리오가 왕 도사를 찾은 것이다. 펠리오에 앞서 이곳을 찾았던 러시아 탐험가에겐 석실의 존재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영국의 오렐스타인에겐 석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게 했던 왕 도사였다. 그러나 펠리오의 유창한 중국어 앞에 왕 도사는 무너지고 말았다. 왕 도사는 결국 석실 조사를 허락했다. 1908년 3월 3일, 조사가 시작됐다. 펠리오는 첫날 10시간 동안 쭈그려 앉아 고문서를 조사했다. 대부분 6~10세기의 귀중 문서들이었다. 한문 경전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고문서로 가득했다. 펠리오는 이 석실이 동양학의 보고라고 생각했다. 펠리오의 조사는 3주 동안 계속됐다.
왕오천축국전
그러던 어느 날, 펠리오는 앞뒤 일부가 떨어져나간 필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서명도 저자명도 떨어져나간 상태였지만, 펠리오는 숨이 멎는 듯 했다. 그건 틀림없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었다. 펠리오가 중앙아시아 탐험에 앞서 혜림의 '일체경음의'를 읽고서 거기 나오는 '왕오천축전임'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습득했던 동양학 지식, 한자와 중국어 실력 덕분이었다. 펠리오는 왕 도사에게 흥정을 했다. 17호 석실 안에 있는 모든 문서를 팔라는 흥정이었다. 왕 도사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펠리오는 그를 끝없이 설득했고 결국 왕 도사는 펠리오에게 넘어갔다. 펠리오는 중요 문서 6000여 점을 선별해 500냥이라는 헐값으로 인수했다.

펠리오는 5월 30일 둔황을 떠나 10월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문서를 포장해 프랑스로 부쳤다. '왕오천축국전'은 곧바로 파리에 있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1909년 5월 펠리오는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다.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는 혜초가 신라 승려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실크로드와 '왕오천축국전'을 연구해온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단언한다.

혜초는 704년경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719년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밀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4년 뒤인 723년 열아홉 살 때 그는 인도로 구법(求法) 기행을 감행한다. 광저우를 출발해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지나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이어 쿠차와 둔황을 거쳐 727년 11월 당나라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에 돌아왔다. 장장 4년에 걸친 약 2만km의 대장정이었다.

'왕오천축국전'엔 그의 대장정의 여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시도 기록되어 있는데,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그 편에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 구나/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지금 이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경주)으로 날아가리.> 이와 같이 시까지 남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다섯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을 돌아보고 쓴 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기행문엔 다섯 천축국은 물론이고 서역 지방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가득하다. '왕오천축국전'은 발견 당시 앞뒤 부분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총 227행에 5893자. 세로 28.5cm, 가로 42cm 크기의 종이 아홉 장을 붙여 만들었다. 총 길이는 358cm.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필사본에 대해선 혜초가 직접 썼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혜초의 원본을 보고 누군가 필사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오영선 학예연구사는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필사했을 경우에 그 연대는 10세기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라고 말했다.

혜초의 천축 여행은 기본적으로 구법 여행이었다. 동천축국 여행에서의 주된 관심은 불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으로 옮겨가면서 혜초의 관심은 불교에 머무르지 않았다. 정치-경제-사회는 물론이고 의식주와 같은 일상생활, 언어와 지리-기후 등 자연환경으로 확대되었다. 인간 삶과 관련된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혜초는 구법의 길을 떠난 밀교승이었지만 동시에 호기심 가득한 문명탐험가였다.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여행길은 실크로드를 관통했다. 혜초는 4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고향땅 경주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앞서의 시가 또렷이 나와 있다. 먼 이국땅에서 달 밝은 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계림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계림은 경주를 말한다. 이 시는 바로 그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혜초는 이처럼 고국을 그리워했으나 당나라 땅 장안에서 밀교를 연구하다 780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이국땅에서의 그의 죽음은 어쩌면 세계인으로서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정 소장의 말. "혜초는 사상 최초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고 현지 견문록을 남겨 동서문명교류사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 지안스님은 "다른 어떤 기행서보다도 혜초의 글은 순례길에서 몸으로 직접 체험한 현장감이 살아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방향, 왕의 이름, 언어와 기후, 풍습, 왕이 소유한 코끼리 수, 종교적 성향 등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해 생동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분명 우리 한국 태생의 큰 인물이요,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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