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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80>/ 荷村 朴禎
32세에 세상 뜬 ‘요절한 천재’
호남가단 받침목 訥齋의 형…“3형제 중 白眉”
巨儒 김종직 “참으로 조정의 그릇이다” 찬탄
“인간세상의 막힘 높은 곳에 올라 씻어내고자…”
遺作 ‘登瑞石山賦’에서 사나이의 호연지기 피력
입력시간 : 2013. 09.06. 15:26


무등산에서 내려다본 광주시내. 박정은 이를 길가의 개미둑에 비유했다.
무등산 자락에 마음을 쉬고, 풍광이 수려한 길목에 누정을 지어 '계산풍류'를 즐겼던 호남의 선비들. 그 중에서도 꼿꼿함과 청백리로는 박수량과 박상이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으뜸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면앙정, 식영정, 소쇄원, 송강정을 찾는 후배들의 가슴을 활짝 열리게 하고, 그 빛 오늘에 뻗치고 있다. 조선 중기, 혼란을 거듭하는 정치와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글을 썼던 이곳엔 호남가단이 형성되어 송순을 비롯해 고경명·임억령·김성원·정철 등이 주름을 잡았다.

이 커다란 산들의 한 세대 앞선 인물로 송순·임억령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호남가단 형성의 받침목이 된 이가 있으니, 눌재 박상(1474~1530)이다. 청렴강직한 성품, 탁월한 문장력, 행동하는 선비로 당시 이 지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어른이다. 이런 눌재와 육봉 박우가 하촌(荷村) 박정(朴禎)의 동생이다. 이들은 성균진사 박지흥(朴智興)의 아들들로, 광주 봉황산 아래에 있는 방하동(芳荷洞)에서 태어났다.

이 3형제 가운데 박정이 가장 영특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박정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박정은 세조 13년(1467)에 태어나 연산군 4년(1498) 32세로 생을 마감했다. 요절한 천재였다. 박정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상에 그 품은 뜻을 미처 펴지 못했고, 그가 쓴 글 또한 병화(兵火)에 없어져 남은 작품을 찾기 어렵다. 그에 관한 글은 동생 박상의 '눌재집' 부집(附集) 1권에 전하는 '등서석산부(登瑞石山賦)'와 몇 줄 안 되는 글이 전부이다. '눌재집'에 따르면, "공의 휘는 정(禎)이요, 눌재 선생의 형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인품이 순성하였으며 문장과 학술이 모두 뛰어나 어진 선비들을 벗으로 삼았다. 서로 그를 추천하여 말하기를 백미(白眉)라 하였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호남의 안렴사(按廉使)로 와서 예(禮)를 다하여 그를 대접하고 '참으로 조정의 그릇이다'고 하였다. 공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익히고 눌재, 육봉 두 동생을 가르쳐 모두 명유가 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송나라의 문장가인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에 비유하여 송에는 부자(父子) 삼소(三蘇)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 삼박(三朴)이 있다고 하였다. 열여덟(성종 23년, 1492)에 생원이 되었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 저술이 병화에 소실되고 '서석산부' 한 편만 전한다"고 하였다.
최근 부정기적으로 개방되고 있는 무등산 정상부의 여름 풍경. 남긴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박정은 가을에 무등산에 오른 것으로 여겨진다.


박정이 남긴 '서석산부'는 그가 어린 두 동생 눌재, 육봉과 함께 서석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산에 올라 얻은 바가 있는지를 묻고 곧 몸 씻을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 이 작품을 구술하였다고 전한다. 젊은 나이에 높은 산에 올라갔다 온 후 읊은 시문인데, 어쩐지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외지고 궁벽한 곳에 살아 활동이 막히고 통하지 않으니 심사가 울적하다"는 첫 머리를 보면, 세상을 뜻대로 할 수 없어 울분에 찬 젊은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거니와 요절을 예감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답답한 마음을 높은 산에 올라가 훌훌 털어버리고자 서석산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니 백두산에 오른 듯 세상이 논두렁 같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하루살이 같다. 서석산 중봉에 올라 내려다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등서석산부'에서는 무등산의 역사를 엿볼 수도 있다. 박정은 서석산 절경 속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듬고 이를 빼어난 솜씨로 읊었다. 고구려-신라-백제 3국의 대립, 후백제의 흥기(興起), 고려시대의 번영, 조선 때 절반의 태평성세를 담았다. <외지고 누추한 인간세상에 살아/ 활동이 다 막히고 통하지 않으니/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한바탕 울적한 내 가슴을 씻어내고자/ 짚신 신고 칡넝쿨 붙들고서/ 서석산 여러 봉우리에 올라/ 쌓인 풀 뛰어넘어 홀로 우뚝 서서/ 바위 위 작은 소나무를 어루만진다/ 새매 후드득 날아올라 돌아보니/ 일순간에 멀리 하늘 날아가는데/ 슬프게도 신선술 배울 방도는 없고/ 무덤마다 쑥밭에 묻혀 있다/ 눈을 돌려 사방을 휘돌아보니/ 하늘은 아득하여 다함이 없고/ 물은 하얗게 천 번을 굽이쳐 흐르는데/ 산은 창끝처럼 솟아 만 겹이어라/ 저렇듯 성읍이 옹기종기 모여 있음이여/ 길가의 개미둑 늘어섬과 같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것은/ 하루살이가 크고 작은 여러 곳에 붙어사는 것이라/ 두류산이 그 어딘가 물었더니/ 하늘 동쪽 겹겹이 이어진 봉우리의 끝이요/ 먼 바다의 아득함을 바라보니/ 탐라의 형상 눈 안에 들어오네/ 아아, 호남지역 일대를 /중국 형주와 양주에 비한다면 어느 곳이 웅장한가/ 지세는 장쾌하여 멀리 뻗어 있고/ 논밭을 일구어서 한결같이 풍작이다/ 문득 지난 옛일로 마음 달리니/ 깊은 마음속 울분이 더 한다/ 바야흐로 신라와 백제가 할거하던 시절에는/ 활시위에 살을 꽂아 당기기에 힘썼으나/ 도적 견훤이 멋대로 날뛰고/ 거듭 흉악한 어린애 화를 지음에 이르러서도/ 아룡은 혼미하여 그 힘 떨치지 못해/ 바깥 도둑 이를 틈타 차례로 침공하니/ 제비는 진흙 물어 숲 속에 집을 짓고/ 학은 오랑캐를 물리치는 소리도 없었다/ 하늘이 준 고을은 도적의 소굴이 되고/ 전사자의 해골은 수풀 속에 뒹굴었다/ 고려 태조의 뛰어난 무공에 힘입어/ 흉포하게 날뛰는 남은 무리 소탕하여/ 귀신이 울부짖던 거친 땅에/ 농작물 무럭무럭 자라게 하였다/ 백년 세월 지내며 천하가 태평하자/ 오히려 배불리 먹고 진하게 취해/ 장수들은 수루에서 갑옷을 벗고/ 백성들은 범천(梵天)의 궁전에 몸을 버렸다/ 비록 태평한 모습은 있으나/ 왕자(王者)의 봄이 선가(仙家) 이씨에게 돌아오니/ 커다란 화기(和氣)가 누리에 가득하여/ 하늘의 북극으로 뭇별을 거느린 듯/ 또한 양자강과 한강이 바다로 흘러가듯/ 마침내 하늘 우러러 휘파람불며/ 구름 저 편 외로운 기러기를 보낸다/ 해는 어느덧 저녁 빛으로 변하여/ 노을 조각조각 붉은 빛을 드리우니/ 절정의 장관 보느라/ 오래도록 서성이며 지팡이에 기댄다.>

세상의 변화는 무등산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고려사'에 보면, ‘민속에 무등산곡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백제시대에는 백성들이 이 산을 성(城)으로 삼고 편안히 살면서 즐거워 부른 노래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려 고종 43년(1256)에는 몽골이 침략하여 차라대가 무등산에 주둔하고 군사 1000명을 보내어 남으로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또 우왕 때는 지리산에서 도망 온 왜구들이 무등산 규봉사에 진을 치기도 하였다. 또 조선 초기에는 도둑이 들끓어 조정에서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를 안고 무등산은 지금도 묵묵히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박정은 무등산 승경을 보면서 그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습을 본 것일까. 무등산을 읊은 시문 가운데 슬픈 인간사가 우러난다. 한데, 동생 박상 역시 형 박정의 시를 닮았는지 슬픈 인간사가 우러나고 있다. 박상이 우마에 실려 용인으로 떠나는 조광조의 시신을 보고 슬픈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남대에서 벼슬옷 입던 일일랑 돌이키지 말자/ 손수레에 실려 초초히 고향으로 돌아가네/ 다음해에 지하에서 다시 만날 때/ 인간만사의 그름을 말하지 말자.> 형 박정이 이를 보았다면 어찌 읊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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