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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86>/ 沙村 金允悌
국문학의 ‘큰 별’ 송강의 스승
임백령이 주동한 을사사화로 나주목사 퇴직
환벽당 짓고 후학 길러 걸출한 인물들 배출
입력시간 : 2014. 03.25. 20:04


환벽당의 도도한 자태
광주를 품은 무등산 3구간 역사길은 정철의 어린 시절 스승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72)와 환벽당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충효동 지역에 숨겨진 이야기 등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충절 의향과 역사 교육을 겸한 걷기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 무등산 옛길 3구간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식영정의 남쪽에 있는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와 정철의 이야기다. 사실 자미탄 강가에서 놀다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에게 전격 스카우트된 송강 정철은 김윤제의 손주사위다. 가사문학권에 모여 있는 식영정, 송강정, 서하당, 환벽당의 주인들은 모두 얽히고 설킨 친인척들이다.

관광객이 광주댐 근처에서 환벽당으로 올라가려면 1m가 조금 넘는 유난히 낮은 문을 지나야 한다. 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언덕바지에 춘란 모양의 맥문동이 뒤덮여 있고 상사화가 그 사이에 웃고 있다. 이런 푸른 나무를 주변에 두고 우뚝 선 환벽당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정자다. 정자치고는 우람하다. 그 의미를 알아선지 광주광역시는 기념물 1호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환벽당 뒤뜰에는 대숲이 우거져 있고 동백과 백일홍이 그때 그 운치 그대로인 듯 아름답다. 이 정자에 걸려 있는 ‘환벽당’이란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강건함이 배어 있는데, 우암의 글씨는 광주 남구 양과동정에도 걸려 있는데, 위풍까지 지니고 있다. 또 석천 임억령이 환벽당 주변의 아름다움에 취해 쓴 시가 현판에 새겨져 있다.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석양 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 모래 길에 대발 가마 소리쳐 우네.> 눈을 돌려 환벽당 아래쪽을 보면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작고 아담한 이 연못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을 선비들이 떠오른다. 옛날에는 이 연못 근처에 김윤제의 초당이 있었다 하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소쇄원과 환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정자 벽간당이 있었다는데 역시 알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가사문화권을 주목하는 이유는 조선시대 15~16세기 광주-전남 주류 지식인들의 교유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김윤제의 조카인 김성원이 환벽당과 250m 거리에 식영정을 지은 것만 봐도 환벽당 김윤제와 식영정 김성원 관계를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창계천에 홍교를 놓아 식영정과 환벽당을 오가며 장인 임억령과 사촌 김윤제, 그리고 소쇄원 선비들의 가교 역할을 했다.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이 처음 만났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조대와 용소


특히 송강 정철과 환벽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는데, 꿈에 자신의 집(환벽당) 바로 아래 냇가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하인을 불러 냇가에 가보라고 하니, 웬 청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 김윤제가 하인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해 뜯어보니, 생김생김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청년이 바로 송강 정철이다. 송강과 이렇게 인연을 맺은 김윤제는 10여년 간 환벽당에서 송강을 가르쳤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10년 청년시절 동안 많은 학문을 갈고 닦아 자신의 전생애를 화려하게 꽃피운 것이다. 김윤제는 송강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었고 송강 역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식영정이 토론장으로서 격이 있었다면, 무등산 쪽에 가까운 환벽당은 학당으로서의 면모가 대단했던 곳이다. 인재가 보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길러낸 호남 사람들의 희생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지금도 환벽당은 김윤제의 후손이 아니라 정송강의 셋째아들 정근병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500년 넘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인연이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은 사람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끝까지 뜻을 같이 하는 삶, 김덕령의 종조부인 김윤제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 골짜기의 인재들은 어느새 국가의 중요한 대들보로 성장한 것이다. 김윤제는 송강 정철을 외손서로 삼고 주변 정자에 머물고 있는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면앙정 송순 등 선후배 선비들에게 소개하고 교유하도록 다리를 놓았다.

김윤제는 연산군 때 사람이다. 광주 충효동에서 태어난 그는 1532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다. 이어 중식대부, 승문교리 겸 춘추관, 배주관, 홍문관 교리 등 두루 관직을 역임하고 나주목사를 비롯해 13개 고을의 성주를 지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와 친밀했던 임억령의 동생 백령이 주동이 되어 일어난 을사사화 때문에 나주목사를 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바로 환벽당을 짓고 후손과 후학 기르기에 전념했다. 김덕령과 덕령의 형 덕흥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제자들을 모두 국가의 중요한 인물로 길러낸 것이다.

정철과 김윤제의 아름다운 사제 관계를 떠올리며 환벽당을 휘둘러보고 용소가 보이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배롱나무가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반듯하게 잘 쌓은 축대 위에 자리한 배롱나무는 광주광역시 북구청이 이곳 시가문화권 보존 차원에서 자미탄을 재현한다고 몽땅 심어놓은 것이다. 배롱나무를 한자로 자미(紫微)라고 하는데, 우리가 아는 백일홍꽃이 그것이다. 꽃이 세 번 피고 지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쌀밥나무라고도 하고, 나무에 간지럼을 태우면 나무의 끝이 웃는 듯이 움직인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자미탄이란, 백일홍꽃이 피어 있는 여울이란 뜻인데, 이곳 10리에 걸쳐 백일홍 꽃길이 존재했다는 문헌이 나오고부터 재현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남명은 서쪽의 지리산에, 퇴계는 낙동강 동쪽의 청량산에, 김윤제는 지리산 서쪽 자미탄의 성산에 살며 한 번의 만남도 갖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명과 퇴계는 서신 교환을 통해 서로 견해를 주고받았고, 김윤제의 수제자이자 손주사위인 정철은 기축옥사를 통해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을 수없이 죽였으니, 험한 시대를 살았던 끈은 어떻게든 이어지게 되어 있나보다. 정철을 기른 업보가 환벽당에 이어졌는지, 지금 환벽당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산등성이에 엉거주춤 서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원래 담으로 둘러싸인 환벽당 아래의 빈터에는 김윤제의 살림집이 있었다. 환벽당은 식영정 처럼 독림된 정자가 아니라 살림집의 뒤란에서부터 이어지는 뒷산의 중턱에 자리잡은 정자인 것이다. 조성된 당시에 이 뒷산에는 거대한 대나무 숲이 환벽당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 대나무 숲의 푸름이 집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환벽당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 그 푸름은 간 데 없고, 아래쪽에 있던 살림집도 흔적이 없다. 차 떼이고 포 떼였는데 어떻게 집만 남아 그 옛날의 환벽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환벽당은 산세에 밀려 겨우 한쪽을 부여잡고 서 있는 모습니다. 김윤제는 대나무 숲의 수직성에 맞춰 세 칸 건물의 두 칸을 방으로 들이고 정면 전체에 툇마루를 들여 기둥에 좀 더 강한 수직성을 부여했던 것이 틀림없다. 500년 세월이 지났으되, 무등산 자락에서 만난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한국 문학’을 통해 무등산을 휘감고 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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