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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88>/ 예관 申圭植
15세 때부터 눈감을 때까지 大義 위해 몸 던져
1905년 5조약 체결에 음독…右眼 상해 흘겨보는 모습 돼
1911년 33세에 중국 망명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구국운동
臨政이 내분 휘말리자 25일 단식으로 “화합” 웅변 후 絶命
입력시간 : 2014. 06.03. 11:32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신익희(2열 왼쪽에서 세 번째), 신규식(네 번째), 이시영(다섯 번째), 이동휘(여섯 번째), 이승만(일곱 번째), 이동녕(아홉 번째), 안창호(열한 번째) 등 주요 임정 요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청사를 빛낸 수많은 의인열사들의 행장 중에서 예관 신규식(申圭植) 선생의 업적은 이채를 띠고 있다. 재덕과 지용을 겸비한 선생의 생애를 연차적으로 개관하여 보자.

1879년 1월 13일 충청북도 문의군(현재 청주시) 동면 계산리에서 아버지 용양공(龍兩公)과 어머니 최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명성이 높고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가문으로서, 선생도 유년기에는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울 때 뛰어난 두뇌로 10여세에 어려운 경서를 해득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신동이란 절찬을 받았다.

1894년 갑오(甲午) 청일전쟁 당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조선 말엽에 일본,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은 호시탐탐 외부에서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고 있었다. 국가 사회가 해이해지고 정사(政事)는 궤도를 벗어나서 민중은 도탄에 신음하게 되니, 조국의 현실을 통탄한 선생은 안으로 탐관오리를 규탄하고 밖으로 침략해오는 외적을 배격하는 격문을 살포하면서 치열하게 문서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같이 공부하는 학우들을 군대식으로 조직하여 주야겸행으로 조련시켜 숭무정신을 격려하여 외모(외국으로부터 받은 모멸)를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첩자의 밀고로 선생은 수차 체포된 바 있으나 시종 불굴하였다. 이 무렵 선생이 겨우 15세 되는 해의 일로서, 관리들도 탄복하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저항하려는 혁명적 기질을 지니고 성장하였다.

1898년 20세에 관립중국어학교에서 공부하고 1900년 22세 때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모든 학과 성적에서 뛰어난 선생은 학교당국의 부패와 불합리한 점을 공격할 의도 하에 수업 거부·동맹 휴학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원래 군관학교에서 모든 사건의 주동 학생은 일반적으로 군법으로 처단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대동맹휴학을 일으켰을 때 선생은 신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병석에 누워 있었던 관계로 처벌을 모면하게 되었다. 그 뒤 특사가 내려 같은 학생들도 다시 수학하게 되었으며, 선생도 역시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복무하여 보병의 직무를 맡기도 하였다.

1905년 노일전쟁이 끝난 결과,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매국노를 앞세워 망국적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에, 비분강개한 나머지 마침내 음독자결을 하려다가 발견되어 생명은 구제되었으나 음독한 약기가 심해서 마침내 바른 눈이 상하게 되어 외견상 흘겨보는 얼굴이 되니, 그로부터 선생은 자호를 예관이라 하고, 세상사를 일체 흘겨보게 되었던 것이다.
신규식 선생이 처음 묻혔던 중국 상하이 만국공묘의 외국인 묘역.


그 뒤 통분한 심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1907년 8월 1일 군대가 강제로 해산을 당하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에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니, 다시 자결을 하려다가 대종교의 교주 나철 선생의 간곡한 설득과 만류로 구명되었다. 그 뒤 망해가는 나라를 구해보려고 학회 조직이며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정치단체도 참가해보고 교육사업에도 전념해보았다. 한편, 대종교의 교주 홍암 대종사에게 인격과 재능을 인정받고 착실한 신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객관적인 여건이 선생의 입장에서는 국내에서 효과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어렵게 되자 당시 우리와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던 중국대륙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때는 1911년 선생의 나이 33세였다. 첫 정착지가 상해인데, 여기서부터 신정이라 개명하고 중국 국민혁명 투사들과 교우(交友)하여 국민당의 전신인 동맹회에 가담하고, 1911년 신해년 무창의거에 크게 공헌하였다. 신해혁명 당시 선생은 상해에서 혁명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호한민, 대계도, 송교인 등 중국 혁명의 중견 인물들이 발행하려는 민권보(民權報) 창간에 동조하여, 망명 당시 가지고 갔던 여비 잔액 일만 원을 서슴없이 희사하였다.

1912년 7월 4일에는 중국 관내 한인 독립운동기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그 중견 인물은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었는데, 그 구성 인물로 보아 조국 광복운동 전선 앞날에 그들이 끼친 위대한 영향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회원은 약 300명으로, 구미 각지에도 분사(分社)를 두어 성시를 이루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선생은 중국의 혁명투사들과 한국의 지사들간의 동지적 우호와 유대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기 위하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였다.

1915년에는 박은식 선생과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만주·노령의 동지와 국내의 한진교, 선우혁 등과 중국 결사에 가입하여 이등휘, 당문치, 진과부 등 쟁쟁한 중국 명사들과 유대를 굳게 맺었고, 장계란, 호정지 등과는 한국 역사를 공동 연구하여 잠시 ‘진단(震壇)’을 발행하여 한국 혁명의 대외 선전활동을 겸하였다.

1917년 8월에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의 이름으로 조선 독립을 요망하는 호소문을 제출하여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었다. 1918년 11월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선생은 만주를 비롯한 각지의 혁명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여 39인이 서명한 무오(戊午)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하였다. 다음해 3·1만세 소리가 삼천리강산에 메아리쳐짐에, 당시 몸은 비록 이역에 떨어져 있었으나 선생은 국내 동포 대중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중국 혁명객, 망명지사들과 제휴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후 선생은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외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국 호법정부의 특명전권대사로서 광동에 있는 호법정부의 대총통 손문 선생과 친히 면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받게 한 것은 그 공을 오로지 선생에게 돌려야 한다. 당시 우리 임시정부는 선생을 비롯하여 식견과 인격에 있어서 탁월한 지사들의 집합처인 양 모두 우러러 동경하게 되었으나, 개중에는 자각이 모자라는 인물도 기생하고 있어 임정(臨政)의 내분이 끝날 줄 몰라 선생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데도 임정 내부가 자상천답을 반복하므로, 선생은 25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신음하다 마침내 “정부(政府), 정부(政府)”라는 유언을 남기고 1922년 9월 25일 43세를 일기로 상해 애인리 57호실에서 서거하였다.

천수를 못다 한 짧은 생애 중에서도 한국과 중국의 우호 증진, 젊은 혁명투사 양성, 호법정부의 임시정부 정식 승인 등 허다한 업적을 남겼다. 아울러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저서 중에서도 ‘한국혼 예목루’라는 명저를 남겼는데, 이는 지난날 독일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한다’라는 명저와 루소의 ‘민약론’, 미국 남북전쟁 중에 선포한 ‘흑인노예 해방 선언서’ 이상의 대명저로서 한국 혁명사 또는 문화사상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막대하다.

대의를 위해서 생애를 바친 선생의 유해는 상해 홍구 만국공묘에 모셔졌고, 장례에 참석한 한중 양국 인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본국과 구미 각국의 신문에는 선생의 약력을 대서특필하고 모두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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