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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90>/ 一松 金東三 선생
일제 하 무장독립투쟁 이끈 ‘한 그루 소나무’
1911년 압록강 건넌 뒤 만주-시베리아서 투혼 불살라
1929년 倭警에 체포된 뒤 1937년 마포감옥서 60세로 순국
“죽거든 적 치하 땅에 묻지 말고 화장하여 강에 뿌려달라” 유언
입력시간 : 2014. 07.21. 16:32


지난 2011년 8월 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광복 제66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획전 개막식 후 전시 자료를 둘러보고 있는 참석자들. 일송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도 큰 공헌을 했다.
무장독립투쟁의 거장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에서 김계락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긍식(肯植)이요 자(字)는 한경이었는데, 뒤에 만주로 가서 절개를 상징하는 한 그루의 소나무란 듯으로 일송(一松)이라 호를 지었다.

선생은 나이 약관을 바라보던 때에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져가는 꼴을 보고 뼈저리게 느꼈다. 나라가 망해가는 원인의 하나가 왜적의 침략에도 있으나, 먼저 국민의 무지가 나라를 이 꼴이 되게 한 큰 원인의 하나라고 절규하고 계몽운동에 착수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체된 것을 계기로 향토의 완고한 풍습을 먼저 혁신하도록 눈물겨운 노력을 하면서 1908년에는 마침내 유림(儒林)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대교육의 선구인 사립(私立) 협동학교를 세워 동지들의 추천으로 교감이 되었다. 이 학교는 1919년 3.1운동 때까지 유지되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09년에는 안희재·박중화·남형우 등과 비밀리에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영남 일대에서 교양과 민족정신 앙양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0년에 경술국치로 강토와 민족이 이족의 식민지 노예로 되고 말자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뜻을 같이하던 동지들과 여러 차례 비밀 회합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해외로 탈출하여 독립기지 건설, 젊은 독립투사 양성기관 설치 등을 결의하고 다음해인 1911년 봄 열혈 청년들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여기서 선생이 1929년 왜놈에게 체포되어 암흑에 싸인 조상의 땅으로 옥중 순국을 하려고 되돌아올 때까지, 만주와 시베리아 또는 대륙 중원을 활동무대로 한 눈물겨운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처음 찾아간 곳이 이회영·이시영·이상룡 선생 등이 먼저 와서 자리잡은 유하현 삼원보 부근이었다. 선생은 우선 만주 토민들과 말이 통해야 그곳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중국어강습소를 시작하면서 이회영·이시영·이동영 선생 등과 경학사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만주에 있어 한족 자치기관의 간판을 건 독립운동단체의 효시가 된다.

이 무렵 일송 선생은 어깨에 담요 한 장을 걸머지고 한 푼짜리 만주 좁쌀떡을 사서 하루에 두 끼니를 때우면서 겨울철에도 만주 토민의 여름 신발을 신고 하루 백 리 길을 걸으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찾아다니면서 격려하며 애국심을 심었다. 다음해 경학사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부민단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확대 발전하여 동삼성에서 한족의 자치정부 구실을 하는 한족회가 되고, 남만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서로군정서를 탄생시키게 된다. 부민단은 군사훈련기관인 신흥강습소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민생문제 해결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13년 겨울에는 일송(一松)을 중심으로 한 독립투사들의 발의(發意)로 백서농장을 설치하고 수십 명의 청년건아들이 농사지으면서 훈련하도록 하여 피 끓는 독립투사들의 심신 단련의 핵심기관 구실을 하였다. 장소는 인적이 뜸한 통화현 경내였다. 망망한 수해(樹海) 속 맹수가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많은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여기서 4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와서 1918년 겨울 길림성 왕청현에서 김좌진, 유동설 등 각지에 산재한 독립운동가 39인이 연서하며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선생은 39인 민족대표의 1인일뿐 아니라 이 일을 먼저 발의하였고, 이들 대표의 동의를 얻는 데에 노력하였다. 다음해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선생은 이상용·이탁 등 남만 각지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의 범위와 사업을 확대하여 한족회를 조직하고 무장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하였다가 서로군정서라 개칭하고 이상룡 선생을 독판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일송 선생이 왜경에 체포된 자리인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탐방단.
이 해 여름 일본의 육사를 졸업한 지청천, 김경천 및 대한제국의 육군부위 신팔균, 운남 강무당을 졸업한 이범석 등이 모여와서 신흥학교 입학 지원자가 날로 급증하게 되자 이 학교를 신흥무관학교라 개칭하였다.

이 해 4월에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수립 준비로 임시의정원이 설립되자 선생은 이동녕·이시영 선생 등과 같이 상해로 가서 4월 10일에 임시의원회의를 열고 국호와 정부관제를 의결하였다. 정부 수립의 작업이 끝나자 선생은 만주로 돌아와 서로군정서의 젊은 투사들을 격려, 지휘하여 왜적의 도륙과 기관 파괴에 주력하여, 선생의 지령으로 국경을 넘어 일제 군경과 용감히 싸운 용사로서 왜경에 체포된 인원이 19명에 달하고, 그들의 손에 피살된 일경이 13명에 이르고, 적의 기관 파괴도 수십 건에 달하였다.

1920년 늦가을 일제의 대병력이 간도(間島)로 출병하여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이란 명목으로 서북간도 전역에 걸쳐서 대학살을 자행하여 신흥무관학교는 폐쇄되고 무관생 3백 명은 지청천 안도현을 거쳐서 소만 국경지대로 북진하고, 1921년 5월 군정서가 액목현으로 이전할 무렵 선생의 계제(季弟) 동만씨가 적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다음해인 1922년에는 시베리아의 연해주 각지와 흑룡강성 등지를 순회하며 광복운동의 요지를 물색하면서 각 단체의 통합을 도모하였다. 허나 뜻대로 되지 않아 만주로 돌아와 만주 각지에 분립되어 있는 독립운동단체 통합에나 힘을 다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노력한 결과, 1925년 1월 길림민주회, 의성단, 광정단 등 지방 자치단체를 망라하여 길림성 화순원에서 정의부가 조직되니, 선생은 참모장 및 행정원회에 취임하였다. 부하인 제6중대장 김용택에게 지령하여 화순 유하 등지를 순회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일제의 경찰을 도륙케 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 침략군이 단시일 내에 만주 전역의 중요한 도시 등을 거의 강점하게 되니, 독립운동은 지하로 들어가게 되고 독립운동가는 내놓고 몸부림칠 곳조차 없게 되었다. 특히 선생과 같이 독립전선에서 영도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적의 눈초리가 삼엄하므로 선생의 신변 불안이 극에 달해, 오랫동안 독립투쟁의 거점으로 삼았던 길림을 떠나게 되었다.

일제 침략군이 피 한 방울을 흘리지 아니하고 길림성 성시를 점령하게 된 것은 희흡(熙洽)과 밀약이 있었던 것으로, 1년 전에 독립전선의 영수인 선생과 공동투쟁을 맹세하였던 희흡이 우리 민족의 원수 일제 침략군을 맞아들여 그들의 주구가 되고, 중국인으로서 중국을 적에게 넘겨주려는 매국적으로 전락하여 일제 강압에 굴종은 하였으나 아직 머리 한쪽에는 인간적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선생에게 신원증을 교부하였다. 선생이 만일 희흡에게 부탁만 하였었다면 선생의 일가(一家)는 당시 괴로움 없이 안일하게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불의와 타협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으므로 일시 희흡이 주는 증명서만을 가지고 재기할 기회를 만들고자 동지 이원일을 대동하고 북만(北滿)으로 갔다. 그러나 이 해 10월 초 하얼빈 정인호의 집에서 투숙하던 중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되었다. 15년의 징역 언도를 받고 서울 마포 감옥에서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60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옥중에 있을 때 동지들에게 “내가 조국에 끼친 바 공이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 땅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그 재를 강물에 뿌려달라”고 하여, 그 뒤 얼마 동안 명절 때면 그 후예들이 한강 인도교로 찾아가 선생의 영령을 추모하였다. 선생의 비장(悲壯)한 최후 20년 전, 즉 1917년 이상설 선생이 “죽은 뒤에 시체며 유물을 태워 없애버리라”고 동지들에게 부탁했던 유언을 20년 후 선생이 재현한 것이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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