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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91>/ 錦南公 鄭忠臣
한국 민주화의 성지 ‘금남로’의 주인공
행적이나 이름은 광주사람들에게 생소
이항복 보살핌으로 무과 합격 후 부원수까지 벼락출세
‘이괄의 난’ 진압 공로로 금남군에 봉해지는 영예 안아
이유는 비천한 출신에다 瑞山에 사당-무덤 있기 때문
입력시간 : 2014. 09.11. 14:01


작년 5.18민주화운동 전야제가 열리고 있는 금남로.
광주사람 대부분은 충장로가 임진왜란 의병장인 충효동 출신의 충장공 김덕령을 기리는 도로이름임을 안다. 그런데 금남로의 주인공이 금남공 정충신(鄭忠臣)이지만, 금남공이 누구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금남공 정충신(1576~1636)이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화의 성지길 금남로. 그 금남로의 주인공 정충신이 광주사람에게까지 낯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단서의 하나가 '조선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 보이는 그의 신분이다. <정충신은 광주의 아전이었다. 젊어서부터 민첩하고 총기가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임금이 용만(의주의 옛 별칭)으로 피난하였을 적에 본도 병사가 사람을 뽑아 행재소에 일을 아뢰고자 했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충신이 솔선해 용만으로 달려가자 선조께서 불러보았다. 고상(故相) 이항복이 이끌어 휘하에 두었는데, 매우 친애를 받았다. 갑자년에 별장으로 원수 장만을 따라 남이홍과 더불어 역적 이괄을 토벌해 죽임으로 해서 1등 공신에 책훈됐다.> 졸기에 정충신의 신분은 이와 같이 아전으로 나온다. 그런데 광해군 원년(1609)의 실록에는 천출(賤出)로, 인조 2년(1624)의 실록에는 공생(貢生)으로 나온다. 공생이란 향교 등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전, 천출, 공생 등 실록의 기록은 그가 양반이 아닌 낮은 신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계서야담'에는 정충신의 출생담이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나온다. <정충신의 아버지는 광주 향청의 좌수였는데, 어느 날 밤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이 뛰어나와 자기에게 달려드는 꿈을 꾼다. 괴이하게 여기고 다시 잠이 들자, 또 백호가 달려나와 품에 안긴다. 깜짝 놀란 그가 일어나 뜰을 배회하다가 부엌에서 잠든 식비(食婢)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합환한다. 그리고 식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기가 바로 정충신이다.> 야담에는 아버지가 양반인 향청의 좌수로 나오지만 다른 사서에는 관아의 하급관리인 아전으로 나온다. 아버지가 좌수이든 아전이든 간에 그의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 짓는 노비였다. 조선 전기의 신분을 규정하는 '일천즉천'에 의하면, 정충신의 신분은 용이나 호랑이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노비일 수밖에 없다.

노비 신분인 그가 그의 사후 300년이 훨씬 지나 광주의 중심 도로명의 주인공이 된 배경은 노비에서 부원수로의 벼락출세였다. 그의 벼락출세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직후의 이괄의 난 등 전시상황의 결과물이었지만,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그만의 매력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만이 지닌 매력은 그의 졸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민첩함과 총명함이었다. 만포 첨사 시절인 광해 13년(1621) 후금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기 위한 파견관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했다는 충남 공주 공산성 내 쌍수정. 광주사람 정충신은 이 난을 진압한 공로로 금남군에 봉해지지만, 충남 서산에 있는 이괄의 땅을 하사받으며 사당과 묘도 거기에 남게 된다.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건주위 추장 등을 만나 벌인 담판의 모습은 지략과 당당함이었다. 그의 지략과 당당함은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와 만나 나눈 다음의 설화로 반전한다. <누르하치는 충신의 명성을 일찍이 듣고 회담 장소에 정충신의 기세를 꺾기 위해 좌우에 창검을 든 군사를 배치하고 장소를 호화롭게 꾸민다. 그리고 충신에게 '조선에는 어찌 인물이 없어 너 같은 소소인(小小人)을 보내서 국사를 논하게 하느냐'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충신은 껄껄 웃으며 '우리나라는 예의 도덕을 잘 지키는 나라에는 대대인(大大人)을 보내지만 포악하고 힘만 주장하는 나라에는 소소인을 보낸다'고 맞받아친다. 후금의 태조인 누르하치가 그때야 정충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환대했다고 한다.> 물론 이 설화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설화는 정충신이 몸집은 왜소했지만 기상이 늠름하고 총명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다산 정약용도 1779년 무렵 화순현감이던 부친을 만나기 위해 광주를 지나다 정충신을 떠올리며 다음의 시를 남긴다. <언제나 광산부를 지나갈 적에는/ 가슴속에 정금남이 생각난다네/ 신분은 종직처럼 미천했으나/ 재주는 이순신과 견줄만 했었지/ 옛 사당에는 풍운의 기운 서렸고/ 남은 터에는 부로들의 전설이 전하네/ 웅장하여라, 서석의 드높은 진산/ 그 정기 모아 기남자를 배출했구나.> 젊은 정약용이 정충신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시에 등장하는 옛 사당, 즉 정지와 정충신을 모신 사당인 편방사(片坊祠, 지금의 경렬사. 당시는 동명동에 있었다)가 길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충신의 재능을 이순신과 연결 지은 것은 두 사람 모두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것에 착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에게도 정충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분을 극복하고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었다.

필자는 정약용보다도, 여기서 잠깐 멈춰 생각하니, '금남공 정충신' 생애를 퍼올린 노성태 선생이 더 돋보이는데, 정충신이 지은 책 중에 당시 인기리에 읽힌 '백사북천일록'이 있다. 백사 이항복이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사건을 반대하다 함경도 북천으로 귀양 가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다. 이후 유배지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항복의 유해를 수습해 경기도 포천에 안장하는 과정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정충신은 백사 이항복의 유배에 동행했고, 그의 시신을 거둘 정도로 특별한 관계였다. 이항복이 정충신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졸기의 <이항복이 이끌어 휘하에 두었는데, 매우 친애했다>는 표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항복 아래서 글과 무술을 배운 충신은 이듬해 무과에 합격한다. 그리고 무장이 되어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던 17세기 초반, 국경을 지키는 장수가 된다. 그런 그에게 인생역전의 기회는 이괄의 난이었다. 이괄의 난은 인조 2년(1624년) 인조반정 때 2등 공신에 책봉된 이괄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이었다. 이괄이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간다. 이때 정충신은 도원수 장만의 전부대장이 되어 반란군을 진압한다. 그 공으로 그는 도원수 장만과 함께 진무공신 1등에 책정되고 금남군에 봉해진다. 그리고 충남 서산군 지곡면 대요리 일대 이괄 소유의 땅 45만여평을 사패지로 받는다. 지금 충남 서산군 지곡면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인 진충사가 있고 국사봉 아래에는 그의 묘가 있다. 광주에서 태어났음에도 사당과 무덤이 광주와 멀리 떨어져 있음은 진무 1등 공신인 정충신을 충장로의 주인공인 김덕령보다 더 생소한 인물로 만든 또 다른 이유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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