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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92>/ 白岩 朴殷植
문필로써 독립정신 일깨운 1세대 언론인
1913년(55세) 상해로 건너가 청년 지사 양성 앞장
62세 때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게 “공화정치” 주문
臨政 2대 대통령으로 동분서주하다 병마에 67세로 中서 운명
국내외에서 애국지사와 백성들 식음 전폐하고 통곡하며 애도
입력시간 : 2014. 10.22. 17:41


상해 마당로 포경리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입구.
구한말 대한제국이 망해갈 때 민족 대중을 깨우쳐 구국운동의 역군으로 나서게 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였던 선열들 가운데 백암 박은식 선생은 오로지 문필(文筆)로써 독립정신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당시 언론인으로서도 원로(元老)였지만, 이름이 쟁쟁한 유근, 남궁억, 장지연, 양기탁 선생 등보다 나이도 선배였다. 이렇듯 최연장자인 백암 선생은 다만 연령만이 아니라 뛰어난 총명으로 학문적 분야에서는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였고, 특히 동서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런 선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본관이 밀양인 박용호 선생과 어머니 노씨 사이에서 태어나, 5형제 중에서 손위 네 분이 조사(早死)하고 홀로 자라났다. 자를 「성칠(聖七)」, 호를 「백암(白岩)」이라 하고, 후일 「한국통사」에서는 ‘백두산이 있는 나라의 사람으로, 미쳐서 돌아다니는 노예’라는 뜻으로 태백광노(太白狂奴)라는 별명을 지었다. 1868년(10세 때) 비로소 동네의 서당에서 공부함에 타고난 총명으로 2~3년 동안에 이미 그 재주를 인정받아 마을 사람들에게 신동(神童)으로 불려졌다. 1875년(17세 때)에는 사서삼경과 제자백서를 섭렵하였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문하는 목적을 과거에 두고 시부(詩賦) 같은 것에 치우쳤으나, 선생은 뜻한 바 있어 도학과 정치, 문장학(文章學) 등 다방면에 걸쳐 연마한 후, 고향을 떠난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태훈 선생과 교류하였는데, 이들의 문명(文名)이 도내에서 크게 떨쳐 양(兩)신동이 났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1879년 연안이씨와 결혼하여 평남 삼등으로 이사하였다. 1880년(22세)에는 경기도 광주로 가서 정관섭 선생에게 고전문학을 배우며 정다산학에 흥미를 가지고 정치, 경제학 등 제분야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1882년(24세) 7월, 서울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시무책을 지어 나라에 제출코자 했으나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영변 산중에 들어가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1884년(26세)은 갑신정변이 발행하던 해로, 선생은 춘천의 박문일 선생에게 정자(程子)의 학설을 강론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배 양성에 힘쓰는 한편, 고루한 악습타파와 예교를 흥행하도록 설복시켰다. 1885년에는 자당 노씨의 명에 따라서 향시에 임하였는데 관찰사 남정철이 선생의 인물됨을 인정하여 특선을 내렸다. 1888년에는 동명왕 능회에 자리를 옮기고 중화군에 거주하였다. 이는 왕릉이 중화 오봉산 아래 진주동에 있으므로 관찰사 민병석이 선생의 학문 연구를 도우려는 마음에서 배려한 것이다. 1894년에는 동학란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강원도 원주군 주천에 옮겨 일시 어농생활을 영위하였다. 1898년에는 선생의 전생애 중에서 신기원적인 해로, 본격적인 신문화 홉수며 민족사 연구 개척, 민중 계몽, 근세사회 건설과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위한 구국 방도 강구 등을 위해 앞장서기로 결심하고 거세할 때까지 27년간 몸소 가시밭길을 헤쳐나갔다.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의 고향 마을인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복원된 상해 임시정부 청사. 제69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지난 8월 13일 청사 앞에서 어린이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그리하여 1898년에 장지연, 남궁억, 유근 선생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간행하자 선생은 장지연과 함께 주필로 취임하여 건필을 휘둘렀다. 1900년에는 경학원 강사가 되어 곽종석 선생과 함께 경학을 강의하고, 또 관립 한성사범학교의 교사로 취임하여 국민교육 지도자 양성에 매진하였다. 1905년에는 강제로 체결된 망국적 5조약을 비탄하고 장지연 선생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 게재로 황성신문의 인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영국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독립정신 고취와 유교 개혁을 강조하는 논설 등 예리한 필봉을 휘둘렀다. 1906년에는 신석하, 김명준 등과 함께 서우학회의 회지 「서우」와 「대한자강회보」 등에 애국계몽사상을 앙양시키는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1913년 55세 때는 신건식, 김용호, 임상순 등과 함께 상해로 가서 프랑스 조계(租界)에 박달학원을 세우고 청년 지사 양성에 앞장섰다. 1914년 5월, 홍콩에 이르러 잡지 「향강」의 편집 책임을 지고 원세개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다가 취초를 당하기도 했다. 원세개는 대원군 집정시대에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 민족의 망명 지사들은 당시 병든 중국을 남의 일로만 보지 않고 신해혁명에 직접 참가, 예관 선생, 백암 선생 등이 중국의 동지들과 동지적 교분을 맺고 뜻을 같이하였다. 1915년에는 상해에서 신규식 선생과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 뒤 시베리아로 옮겨 쌍성사에 체류하면서 한족공보를 주관하였고, 교포 계몽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61세 되던 해 3 1운동을 교포들과 같이 단행하고 강우규, 이발생 선생 등과 노인단을 조직하니 불과 수개월에 단원이 수천 명에 달하였다. 이어 4월에는 서울에서 발표된 한성정부의 평정관이 되고, 62세 되던 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12월 8일 비밀리에 상해에 도착하자 환영회에서 선생은 환영사를 통하여 공화정치를 향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격려를 곁들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인이 경영하는 구국일보의 주필이 되고 또 사민보(四民報)의 주필을 겸하였다. 백암 선생은 1924년, 66세 되던 해 11월 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대통령직 대행을 겸하였다. 1925년(67세) 3월 23일에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국가원수로서 행정을 총관하는 직함과 아울러 민족사학가로서의 선생다운 모습을 반영하여 정부에 소속한 각급 직원을 비롯한 재류한족에게 논리적인 정신무장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병환이 들고 말았다. 동년 7월부터 인후염까지 병발되어 병세가 악화일로로 치닫다가 11월 1일 저녁 7시 30분 67세를 일기로, 오매불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이역인 중국 땅에서 마치었다.

11월 4일, 임시정부에서는 처음으로 국장의 예(禮)를 받들어 상해 정안사로(上海 靜安寺路)공동묘지에 모셨다. 이때 내외의 보도기관은 대대적으로 백암 선생의 서거를 보도하여 애도하였다. 조국에서는 선생의 서거를 접한 애국지사들이 분향소를 차리고 식음을 전폐하였는가 하면, 백성들 또한 땅을 치고 통곡하니, 슬픔이 하늘을 찌른 듯 하였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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