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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99>/ 岐峯 白光弘
영호남 문사들 詩藝 겨룸에서 장원한 문장가
우리나라 최초 기행가사인 「관서별곡」의 작가로 유명
호남 문호들과 교유하며 호남 시단 우뚝 세우다 35세에 요절
선비들 “큰 붓 꺾였다” “이 시대 위해 哭한다” “무덤 어루만지리” 애도
입력시간 : 2015. 05.14. 11:07


백광홍이 태어난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기산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 우뚝 솟은 사자산이 품고 있다.
기봉 백광홍(岐峯 白光弘) 선생은 1522(중종 17년)에 전남 장흥군 기산리에서 아버지 삼옥당(三玉堂) 세인(世仁)과 어머니 광산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젊은 시절의 강학은 자세치 않다. 다만,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장흥에 귀양 내려와 13년간 머물렀던 영천 신잠 선생에게 찾아가 학문의 길을 물었던 듯하고, 이후 신잠이 태인 군수로 있을 때 신잠을 따라 그곳에 가서 일제 이항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김인후나 양응정 등과의 교유도 이때 이루어졌다.

선생은 28세 때 부명(父命)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였고, 3년 뒤인 155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제수되었다. 호당(湖堂) 시절 왕명으로 영호남 문사들이 한자리에서 시예(詩藝)를 겨루었을 때, <동지부(冬至賦)> 한 편으로 그 도저한 학문과 문예를 인정받아 장원에 뽑혀 시명을 드날렸다. 이때 상으로 하사 받은 「선시(選詩)」 10책이 지금까지 문중에 전한다. 이후 왕의 총애가 두터워 1555년 평안도평사에 배수되어 변방에 나갔다. 하지만 이듬해 가을, 병으로 교체되어 어버이 문안 차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안 처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누린 해가 고작 35년이었다.

기봉은 명종 10년(1555년)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평안도에 가 있을 때 관방(關防)을 살피고 그곳의 여항 세태와 자연 풍물을 구경하면서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기봉 백광홍은 앞에서 일부 언급한 바와 같이 뛰어난 학문과 높은 인격으로 당대의 명문대가들과 교유가 깊었다. 백광홍은 송강 정철의 유명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낳게 한 기행가사의 효시로 지칭되는 「관서별곡」의 작가로, 삼당시인(三唐詩人) 중의 한 사람인 백광훈의 형이기도 하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남다른 문학적 능력으로 인해 당시 호남의 문호들이었던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 청연 이준백 등과 함께 시를 통해 교유하며 호남 시단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런데도 실제 그의 문집의 간행까지는 참으로 험난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임병 양란을 겪으면서 집안에 남아 있던 유고는 대부분 유실되고, 겨우 남은 것은 열에 한둘뿐이었다. 다행히 백광훈의 집안에 간직된 유고가 수습되었지만, 책으로 묶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기봉 선생 사후 근 300년이 지난 1846년에야 후손이 홍직필의 서문과 묘갈명을 받아, 상하 2책으로 문집의 모양새를 겨우 갖추었다. 이때도 여러 사정으로 간행은 되지 않은 채 문중에 전해지다가 1860년 고부(古阜)에서 집안사람이 간직해온 선생 친필의 「시산잡영(詩山雜詠)」과 관서 땅에 부임할 당시 제현들이 써준 친필본이 수습되면서, 기왕에 편집된 상하책에 이를 보태고, 여기에 「관서별곡」을 더하여 1899년에야 「기봉집」 5권이 비로소 간행되었다. 실로 선생 사후 343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원고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원문 중에는 군데군데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고, 체제도 다소 어정쩡한 형태로 되어 있다. 때문에 수습된 시는 권 1에 부장편 9수, 권 2에 오언절수 10수, 오언율시 21수, 오언고시 3수, 칠언절구 58수를 실었다. 권 3에는 칠언율시 16수, 칠언배율 1수, 칠언고시 11수를 실었고, 권 4에는 「시산잡영」으로 각체 46수와 「관서별곡」 1수를 실었다. 권 5는 부록으로, 제현들의 수창시와 만사 등이다. 결국 현재 남아 전하는 기봉 선생의 시는 각체를 망라하여 175수다. 결코 많다 할 수 없는 분량이다. 간행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정성이 있어 이나마 수습될 수 있었다.

기봉의 학문과 사람됨을 살펴보자. 스승인 이항(1499~1576)은 멀리 관서에서 학문의 가르침을 청하는 기봉에게 '거경궁리'의 가르침으로 일깨운 바 있었다. 기봉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이항은 "그의 재주와 행실이 그 짝을 찾기 힘들었는데 불행히 명이 짧으니 능히 크게 펴지 못함이 애석하구나" 하며 안타까워했다. 양응정(1519~81)은 「만사」에서 <하늘과 땅 다하여 마침 없으니/ 산은 높고 다시금 물은 깊도다./ 유유히 이 삶 가운데에서/ 홀로 백아의 마음을 보았네.>라고 기봉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 꿈에 그를 만나고 나서 지은 시에서는 ‘대유(大裕)가 세상 뜨자 큰 붓이 꺾였다’며 안타까워하였다. 과거에 함께 급제했던 홍진은 장편의 만사에서 기봉의 인간과 학문을 다음과 같이 기렸다. <그대는 도의가 있어/ 깨끗한 절조 맑게 닦았지./ 그대의 문장은/ 천고에 남을 보석./ 마음가짐 화평하여/ 남이 원망하고 미워함 없었네./ 그 성품은 곧고도 공정하여/ 선비의 훌륭한 표양이 되었지./ 이제 다시는 그대 있지 않으니/ 내 누구를 좇을 것이랴./ 사람들은 그대 위해 곡을 하지만/ 나는 이 시대를 위해 곡을 하노라./ 그대가 인간세상 내려 왔을 젠/ 어찌 기약 둔 바가 없었으리요./ 동량의 재목될 마음을 품고/ 창생이 기댈 바를 자임했었지./ 세상에서 할 수 없음 알아 떠나니/ 그 흰 바탕을 온전히 했네./ 그대가 밑바닥에 있을 때부터/ 나는 그 인품을 알아보았지./ 예전 외사(外舍)에 올랐을 적엔/ 먼저 장유(長幼)의 차례 세웠네./ 정론 위에 붉은 깃발 세워놓으니/ 선한자가 기대어 무겁게 여겼었지/ 좋지 않은 떠들썩함 두려워하니/ 그대 모습 그대 목소리 접할 길이 업구려./ 그 따스함은 영영 멀어졌구나!/ 이 참담한 심정 견딜 길이 없나니/ 그대 어이 떠나 바람 앞에 날 목 메이게 하는가.> 구절구절마다 폐부에서 우러난 진정이 배어있는 글이다. 실로 기봉 선생의 인간과 학문에 대한 적평이라 하겠다. 이 한편으로 선생의 인간이 어떠했는지, 또 당대 사람의 추중이 어떠했는지는 알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임자년에 문과에 함께 급제했던 기대승(1527~72)도 「유상찬」에서 <일제 선생 스승 삼아/ 문장으로 이름났네./ 배움에 연원이 있어/ 벼리를 꽉 잡았지./ 홀(笏)을 들고 조정 서매/ 선비들이 뒤따랐지./ 남 비방함 없었으니/ 원수원망 산 일 없네.>라는 말로 그 학문과 인간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그는 이와 별도로 남긴 「만사」에서 <재주 논함 언제나 사문 있음 기뻤더니/ 병에 걸려 이 길이 나누어질 줄 알았으랴./ 북풍에 눈물 뿌려 머리도 희려 하니/ 봄 오면 하릴 없이 외론 무덤 어루만지리.>라고 급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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