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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03)/ 圭巖 金躍淵 선생
전성기 일제에 맞서 구국 혼 불태워
31세 때 독립운동 뜻 세우고 북간도 이주
교육자이자 애국 사상가로 동포들 이끌어
항일 시인 윤동주도 선생의 사상 영향받은 대표적 인물
입력시간 : 2015. 10.09. 12:05


김약연 선생은 북간도에 명동학교를 세워 독립지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터에는 지금 표지석만 쓸쓸히 서 있다.
규암 김약연(圭巖 金躍淵) 선생은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져가던 현대사에 있어서 위대한 교육자이며 애국지사였다. 특히 그는 조국 광복운동의 무대 중 하나인 북간도 동포들이 자부(慈父)와도 같이 받든 분이다.

1920년 봄, 즉 간도에서 일제 무리의 세기적(世紀的) 광기가 발작하기 몇 개월 전의 일이다. 독립운동자들을 취체·탄압하라고 강요하는 일제 군벌의 협박에 못 이겨 북간도에 주둔한 중국 당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본의 아니게 일제 무리가 가장 꺼려하는 규암을 감금하였다. 명동학교라는 교육기관은 스파르타식 교육방식으로 독립지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면서 부단히 동포들을 혁명민중화하는 활동에 주력하므로 내외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다.

감금된 규암을 석방시키려는 국민희 대표 허동규와 중국 당국의 서동하의 대담은 다음과 같다. <△서 : 귀국 독립운동자들의 파당이 왜 그렇게 많은가? △허 : 그렇다. 외관상으로는 감심(感心)이 안 될 것이나, 사실은 방략상(方略上) 책임 분담을 위해서 여러 파로 갈라서 활동하는 것이 능률이 오른다. △서 : 귀(貴) 독립군이 야지(野地)에서만 출몰하여 일본인의 시끄러운 외교문제만 야기하는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허 : 대일 전쟁 준비를 위한 인원과 군자금을 모집함에 있어서 부득이한 것이다.> 이렇게 기타 등등의 발언 중 허 대표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모습을 본 서동하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중국인에게도 불공대천지원수이므로 우리 양국민이 합심하여 싸우는 한 길뿐이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 재회(再會)를 눈물로 약속하고 헤어졌으며, 규암 선생은 곧 석방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큰 패배를 당하고 훈춘사건을 날조하여 대군을 침입시켰으나 10월 중순 청산리전투에서도 대패했다. 그 앙갚음으로 비전투원인 재류(在留) 한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먼저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송언평이란 한인부락을 폐허로 만들고 규암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명동 장제촌으로 몰려온 왜놈 군경은 명동학교를 불태우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남녀노유를 닥치는 대로 학살한 다음, 가장 악랄하게 광기를 부려 노루바위(장암동) 부락의 동포 수백을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부락의 참상을 널리 알리려고 결사적으로 보도활동을 하던 동아일보사 장덕준 기자가 학살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규암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김용기 선생의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875년 8세 때부터 10년간 한자를 공부하며 공자와 맹자의 도를 파악하여 선비로서 일가견(一家見)을 소양하였으며, 1899년 김정규, 문치정 등 10여 호의 가구(家口)와 함께 고국을 등지고 북간도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에 정착하여 중국인의 임야 수천 평을 구입하고 개간에 착수하였다. 곧이어 조국으로부터 모여드는 인원이 증가하여 큰 부락을 형성하였다. 동포 자제 교육을 위하여 규암재라는 서당을 세우고 구식교육을 시키다가 1906년 이상설, 이동년이 용정 서전평야에 세운 서전서숙 숙장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로 떠나고 일제무리의 간섭으로 폐교가 되자 여기서 배운 규암 선생의 종형 김학연과 박무림 등을 맞이하여 규암재를 토대로 명동학교를 세웠다.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립지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재류동포를 혁명민중화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규암은 실제로 북간도에서 민족운동 각 분야 다방면에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규암은 민중 계도와 교육을 위해서 예수교로 개종하고, 신진 엘리트인 정재면 선생을 명동학교 교사로 초빙하고 사학자 황의돈과 언어학자 장지영 등도 초빙하니, 명동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서 국내의 오산학교와 쌍벽을 이뤘다. 1917년에는 변무사 오록정의 인가를 얻어 간민교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서 한인 교육을 지도하였으며, 1918년에는 북경정부의 인가를 얻어 간민회를 창설하고 그 간사로서 자활운동의 기초공작을 마련하였다. 1919년 1월경에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려 할 무렵 규암은 전로한족중앙회(뒤에 국민회의로 개칭)에 초빙되어 정재면과 함께 러시아 니코리스크 회의에 참석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대활약을 하였다. 동년 3월 용정 서전평야에 1만여 동포가 모여 일으킨 역사적 대의거 때는 러시아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민중 동원과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가 17명이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규암은 3·1의거에 제자들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북간도로 되돌아와 순민족주의적 통일전선을 획책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규암이 북간도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탐지한 일본 관헌은 그를 체포하려고 그가 통과할 도로를 누볐다. 이를 눈치챈 규암은 발길을 재촉하여 와룡동에 있는 동지의 집에 은신했다. 그러나 평소부터 규암의 친중사상과 그 인간성에 호의를 베풀어온 중국 당국의 신변보호와 정치적 고려로써 안전할 수 있었다. 규암이 중국 당국에 끼친 좋은 영향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영도한 간민교육회와 그 산하 교육기관들이 많은 혜택을 받았다. 간민교육회는 장족(長足)의 발전을 하다가 분열이 심해지자 김립과 윤해는 길림지방으로 가버렸고, 와해 직전에 규암의 탁월한 영도력으로 다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굳건한 기틀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은행권 15만원 사건으로 교수대의 이슬로 순국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와 이들의 동지인 박웅세, 그리고 최봉설, 나운규와 기미 3월 13일 용정대회에서 순국한 17명의 청년들은 모두 직접-간접으로 규암 선생에게서 지도를 받은 인재들이었다. 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도 규암의 독립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4년 흉년으로 명동학교가 다음해 폐교될 때까지 15년을 유지해가는 동안 1천여 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명동학교가 폐지되면서 재학생은 용정 은진중학에 편입하였고, 명동이란 명칭은 소학교에 관사로 겨우 이어져 계속되었으나, 본래의 명동정신은 애석하게도 사라지고 말았다.

만년에 이르러 규암은 용정 은진중학의 이사장으로 추천되어 교육의 일선에서 물러나 뒷바라지를 해오다가 1942년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자신이 개간한 이역에 묻혔다.

규암의 셋째동생 김유연은 만주에서 모범농민으로 국민학교 교과서에까지 소개되었고, 그의 둘째아들은 숭실학교 교사로, 누이동생 김용의 아들 윤동주는 애국시인으로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규암의 맏아들 정근은 병원을 경영하다가 1945년에 작고했다. 정근의 맏아들 규섭은 은진중학 출신으로 1979년 작고했고, 둘째아들 중섭은 일본대 졸업 당시 사할린에 학병으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규암의 둘째아들 정훈은 2남1녀를 두어 맏아들 규섭은 서울에 있고, 둘째아들 명섭은 미국에서 목사로 봉직 중이라 한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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