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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05>/ 사육신(死六臣)
조선시대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 몸으로 실천
삼촌(수양대군)에게 왕위 뺏긴 단종 복위운동 나섰다가
동지의 밀고로 탄로나자 처참한 고문에도 ‘忠 ’ 안고 사망
방치된 이들의 시신은 생육신인 김시습이 수습해줬다고 전해져
입력시간 : 2015. 12.14. 21:14


서울 동작구 사육신공원 의절사(義絶祠)에서 지난해 10월 사육신 추모제향이 열리고 있다.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훈민정음은 지식층인 양반들의 외면으로 오랜 세월동안 간신히 명맥만 유지되어오다 1894년에 일어난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인해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갑오경장 이후부터 훈민정음은 ‘한글’이라고 불리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한글이 일제 강점기 한동안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여야 하였지만 우리 민족은 일본의 총칼 아래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한글을 지켜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글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음운 구조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글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이 한평생을 백성들을 위해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뒤를 이을 세자 때문이었다. 세자 즉, 문종(文宗, 재위 기간 1450~52년)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고 성품이 어질었으나 몸이 매우 약하였다. 세종대왕에게는 18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세자의 바로 아래 동생인 수양대군(세조)은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인물이었다. 이에 세종대왕은 형제들 사이에 왕위를 놓고 다툴 것이 걱정이 되어 죽기 전에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세자와 나이 어린 세손(단종)을 보살펴줄 것을 유언하였다.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문종은 민의를 파악하여 문무(文武)를 골고루 등용하였다. 그러나 몸이 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자리에 눕고 말았다. 문종은 그때 겨우 열두 살인 세자 즉, 단종(재위 기간 1452~55)이 못내 마음에 걸려 황보인과 김종서를 비롯하여 성삼문·신숙주·박평년 등에게 보살펴줄 것을 당부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정인지·한명회·권남 등과 결탁하여 왕위를 빼앗을 모의를 시작하였다. 특히 한명회는 생살부(죽일 대신들의 이름을 적은 명부)를 만들어 계유정난의 틀을 마련하였다. 수양대군의 움직임이 이상해지자 김종서 등이 이를 알아채고 대비하였으나 수양대군측은 더욱 기민하여 먼저 김종서를 죽인 뒤 왕명을 빌려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인 뒤 생살부에 적힌 대신들을 궁궐의 제2문에서 철여의라는 쇠뭉치로 때려 죽였다. 반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김종서 등과 안평대군(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이 역모를 꾀하기에 그들을 제거하였다고 말하였다.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교동으로 이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반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왕위에 오를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사건은 계유년인 1453년에 일어난 일이어서,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난을 성공시킨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이조판서·형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면서 조선의 모든 실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숙부인 수양대군의 위세에 눌린 어린 단종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자 수양대군의 측근들은 더욱 교묘히 단종을 괴롭혀, 단종은 마침내 1455년 왕위에서 물러나 수양대군에게 양위함으로써 수양대군은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재위 기간 1455~68)가 되었다.

비록 세조가 선양(왕위를 물려받음)의 형식으로 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명백한 계략에 의해 이루어진 왕위찬탈이었다. 이 때문에 충신들 중심으로 1455년에 단종 복위 운동이 벌어졌는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조정을 떠나거나 반발을 일으켰다. 특히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대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박평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은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함께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에서 지내고 있는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같이 행동하기로 한 김질의 밀고로 탄로가 나 성삼문 등은 붙잡히고 말았다. 세조는 직접 성상문 등 6신을 심문하였는데, 취조는 밤낮없이 이루어졌고 가혹한 고문과 작형이 6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참기 어려운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6신들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세조는 6신들 중 성삼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모의 사실을 부인하면 살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성상문은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으리」라는 칭호는 신하들이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것으로, 성삼문이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왕자로 취급한 것이었다. 이에 세조는 더욱 더 심한 고문을 하게 하여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에 다리와 팔을 잘리고 말았다. 그러나 성삼문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끝내 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얼마 후 성삼문은 계속되는 고문으로 궁궐 안에서 세상을 떠나고, 박평년 등은 한강 가(지금의 용산역 부근)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박평년 또한 성삼문과 마찬가지로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충청감사로 있을 때조차 장계(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이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에 한번도 '臣'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며, 단종을 세자 때부터 가르쳤던 유성원은 사건이 탄로나자 성균관에서 자결하였다. 사람들은 이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하였다.

세조는 이들의 가족들은 물론 자신에게 반대의 뜻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역모로 몰아 처벌하였다. 조카인 단종도 의심하여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뒤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내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를 폐서인하였으며, 자신의 동생인 금성대군도 귀양보냈다. 억울한 귀양을 살게 된 금성대군은 부사인 이보흠과 손을 잡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역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일도 밀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세조는 금성대군이 자신의 친동생이었으므로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귀양을 보냈으며, 이보흠 등은 주살시켰다. 그러나 정인지, 신숙주 등은 언제 또다시 역모가 일어날 지 모른다며, 그 불씨인 금성대군을 치죄(治罪)할 것을 거듭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과 노산군을 사사하였다. 이때 노산군, 즉 단종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단종 폐위 사건은 뒷날 사화(士禍)나 문인(文人)·학자 간의 대립과 반목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세조는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처참하게 살해된 사육신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게 하였는데, 어느 날 밤 삿갓을 쓴 사람이 나타나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었다. 목숨을 걸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어린 시절 신동이란 소리를 듣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었다고 한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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