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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11>/ 東嚴 鄭煥直 선생
일제와 싸우다 아들에 이어 순국
구한말 3대 의병대 중 하나를 이끈 충신
고종의 뜻을 받들어 1905년 말부터 무장투쟁에 앞장
1907년 義陣 해산 후 홀로 被逮돼 의연히 흉탄 받아
입력시간 : 2016. 06.08. 12:06


포항의 산남의진 발상지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 정환직 선생이 고종의 ‘華泉之水’의 뜻을 받들게 된 내력을 적은 비석.
의병항쟁에서도 1906년에 일어난 최익현 선생을 총사로 추대한 순창의병과 민종식 선생을 총사로 한 홍천(洪川)의병, 동엄 정환직(東嚴 鄭煥直, 1843~1907) 선생 부자(父子)를 대장으로 추대한 산남의진 등 3대 의병진이 병오(丙午)의병의 대표다.

정환직 선생의 산남의진은 의병 항쟁사에서 남다른 점을 발견케 한다. 우리 겨레에겐 잊지 못할 운명적인 눈물 많은 정미년(丁未年, 1907년)에 수당 이남규 선생과 아들인 충구(忠求) 청년이 온양 부근에서 왜놈의 칼에 맞아 같은 장소-시간에 순국하신 것, 이천에서 구연영 선생이 아들인 정서(禎書) 청년과 같은 시간에 왜놈의 흉기에 찔려 순국하신 사실 등은 모두 같은 핏줄을 받은 우리들을 비통케 한 사건이다. 정환직 선생과 그의 큰아들 용기 장군의 순국한 시일은 다르나 아들 용기 장군이 먼저 장렬히 전사를 하여 아버지로서 비통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조국애까지 곁들여져 역전분투하다가 흉적 일본 군사에게 총탄을 맞은 순간에도 태연자약한 모습을 잃지 않은 동엄 선생 부자야말로 우국과 충효의 화신이다. 아들인 용기 장군이 먼저 전사를 하자 동엄 선생은 의병군 대표자가 되어 조국 광복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적개심이 곁들여져 혈전을 전개하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1843년 5월 19일 경상도 영천군에서 정유원 공과 순천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에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혀 재사로 이름을 떨쳤으며, 약관 이후에는 문장행객으로 강호(江湖)를 돌면서 우국은사 역방과 명승고적을 탐사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불혹의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삼남참오령,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지난 4월 22일 오전 경남 의령군 충익사. 제44회 의병제전을 맞아 의병들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추모제향이 거행되고 있다.
그 뒤에 환갑이란 노령에 들면서 잔인한 일제 무리의 마수에 걸려 망국의 구렁으로 말려들게 되고,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늑결되면서 국권 상실은 물론 임금은 일본의 앞잡이이던 이등박문 무리가 제멋대로 다루는 꼭두각시 처지에 놓여 있으니 신념은 표현할 바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날 선생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시(入侍)하니 임금은 오열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경(鄕)은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 하시면서 「짐망(朕望)」이란 밀조(密詔)를 내려 주었다. 화천지수란, 서기전 595년 고대 중국 제나라의 임금 경공이 적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생사가 눈앞에 닥쳐왔을 때에 장군 봉축부는 임금과 옷을 바꾸어 입고서 수레 위에 올라앉고 임금은 말을 몰고 있다가 적에게 체포될 순간, 봉축부가 말하기를 “내 목이 마르니 화천에 가서 물 한 잔 떠오라”고 하였다. 다행히 임금은 그러한 기회를 타서 도피할 수 있었으며, 봉축부가 임금 대신 체포되어 목숨을 바쳤다. 동엄 선생은 이상과 같은 밀조를 받고 눈물을 머금고 어전을 물러섰다. 1905년 12월 5일 동엄 선생은 관직을 사퇴하고 서강 사저로 돌아와 큰아들 용기에게 "나라의 형세가 어지러워져 민족의 존망이 경각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은혜를 입은 아비는 죽음으로써 국가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아야겠다. 오늘 임금에게서 중대한 사명을 받았으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사나 돌보아라" 하고 임금에게서 받은 밀조를 보이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말하니, 용기는 울면서 하는 말이 "임금이 신하에게 부탁하는 명령은 어버이가 자식에게 지휘하는 명령과 그 뜻은 똑같은 것입니다. 대의는 나라를 구원한 뒤에야 가정을 보존하는 것인데, 이 중대한 일은 젊은것들이 할 일이온데 어찌 늙으신 아버지께서 하시겠습니까? 그 일을 저에게 맡겨주시면 힘을 다하여 의병을 일으켜 조국을 구원하는 데 사력을 다하겠습니다"라 말하고 3일간을 애걸하니 결국 동엄 선생은 아들에게 양보하여 쾌히 대답하면서 "장하다. 그러면 내 의견을 들어보아라. 나는 서울 동지들과 짜여진 계획이 성패를 예측할 수는 없으나, 먼저 매국노들을 없애고 거국적인 운동을 일으켜 적을 격퇴시키고자하니 이왕에 너와 내가 대의를 위하는 일편단심은 똑 같은 바, 사람들을 영남에서 모집해야겠으니 내려가서 호협하고 의로운 청년들을 모집하여 올라오너라. 나는 가능한 군비를 해두었다가 황실을 옹호하고 천하에 격문으로 살포하면 뜻이 있는 사람들이 호응하여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아들은 "아버지 말씀도 일리가 있으나 저의 생각은 영남은 몇 백 년 동안 문사를 후하게 대접하고 무사들을 박대한 나머지 문약에 빠져 대개 유약해졌으나, 영남의 산하에는 포수가 많이 있어 모두 무기를 잘 다루고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포수를 모집하면 무기는 저절로 모여지게 됩니다. 포수를 모집하여 부대를 편성한 후에 각 주군 군기고에 장치한 무기를 몰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생은 아들의 말을 듣고서 그 의견을 따라 영남으로 먼저 내려가게 하였다. 이렇게 충효로 뭉쳐 나라를 위해 싸웠다.

동엄 선생은 그날부터 의진을 정비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1907년 10월 29일에는 흥해(興海)의 우편소를 습격하여 적이 비치한 전리품을 탈환하고, 11월 3일에는 신녕에 있는 일군분견소를 습격하여 총포 6점을 노획하는 등 청송, 영덕, 의흥 일대에서 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11월 6일 청하면 작전에서 일본군 보병 14연대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게 되자 의진을 해산하였다. 무모한 희생을 막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선생은 단독으로 적에게 체포되었다. 적은 후대와 온갖 교활한 수법으로 선생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나 준엄한 모습으로 기개를 떨치다가 1907년 11월 16일 영천 남교에서 적의 흉탄에 순국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이 거룩한 동엄 정환직 선생과 아들인 용기 장군이 같은 해에 순국한 것은 겨레의 더없는 슬픔이며, 천일도 무광할 듯하다. 장하고 장하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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