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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16>/ 趙明河 의사
일평생 敵魁 처단에 바친 熱血志士
一片丹心 안고 오사카 거쳐 대만 타이중서 기회 포착
황족 육군 대장 刺殺 하려다 실패…23살 ‘꽃’ 떨어져
입력시간 : 2016. 11.09. 13:39


의거 당시 조명하 의사 사진.
청사를 빛낸 선열 중의 한 분인 조명하 의사(趙明河 義士)의 의거 동기와 시기는 남다른 특징을 갖는다. 일제 무리가 가장 무겁게 다루던 그들 황족(皇族)에 대한 불경죄라는 법망에 걸려서 놈들의 형장에서 순국한 의사(義士)는 조명하·이봉창 두 분뿐이다. 조 의사가 1928년 10월 10일 대만에 설치된 적의 형장에서 순국한 지 4년 뒤, 같은 10월 10일 이 의사는 동경 이치가야(市谷) 형무소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전자는 대상한 목적물이 일본 황족이요, 후자는 일황을 처단하려던 것으로, 같은 불경죄에 같은 순국일이 되어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조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상천리에서 조용우 공과 어머니 배씨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의사의 생일이 석가의 탄신일인 4월 8일과 같은 날이었다. 1920년 3월 송화읍에서 6년제 송화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송화읍에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는 친척인 조용기씨 댁에서 한약 처방과 조제를 습득하면서 강의록에 의한 더욱 수준 높은 공부에 열중하였다. 특히 외국어 공부에도 주력하여 영어·불어·독어 등의 실력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장차 활동무대를 국외로 향해,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외국인들에게 역설하여 일제 무리의 포학무도한 식민통치 비정을 알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이해시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미년 3·1운동이 발발할 때, 의사는 아직 15세의 소년이나, 조숙하고 이지력도 장년을 능가하는지라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의분이 넘쳐흘렀다. 특히 의사는 동향인 안중근 의사와 매국노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 의사를 숭모하고, 또 계원 노백린 선생의 감화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조 의사가 한약방에서 강의록 등에 의한 독학으로 각고면려하면서 포부를 키워나가는 중에 가친(家親)이 시키는 대로 이웃 고리개 마을에 사는 오(吳)씨 가문의 규수와 결혼을 하고도 신혼생활을 보낼 여유조차도 없이 실력을 갖추기 위해 송화읍 한약방에서 주로 기거하였다. 그 다음, 22세 되던 해에 사회적 견문도 넓힐 겸 신천군청 서기 임용시험에 응하여 합격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적의 치하라고 하지만 판임관후보로 등용된 것은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국내 정세는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항의식이 고조되어가던 때였으며, 순종 황제의 붕어로 6·10만세운동이 격발되고, 송학선 의사의 금호문(金虎門) 의거며, 이덕삼 의사의 홍구 항쟁이며, 이수흥 의사의 국내 의거 등 독립투사들의 단독 항쟁이 치열하던 시기인지라, 조 의사는 일개 군청 서기로 방관만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동료 선임자인 여중구에게 자신이 품은 청운의 뜻을 전하고 의견을 교환한 결과, 의사가 일본으로 갈 때 여중구 등 6명의 지우(志友)가 경비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는 결혼 후에도 100여리나 되는 곳에 하숙하면서 간혹 향리(鄕里)에 다녀갈 뿐 부인과 따뜻한 사랑을 주고받지도 못할 정도로 오직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와 처자에 대한 애착이 없을 리 없건만, 작은 나보다도 커다란 나, 즉 망국민의 신세를 면하게 하는 노력이 참된 내 가정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결심하여, 만류하는 어머님의 양해를 구하고 여중구 등이 모아준 돈을 가지고 용약 현해탄을 건넜다.

청운의 뜻을 품고 약관의 단신으로 조국을 떠나 원수의 나라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오사카(大阪)에 일시 정착하였다. 항상 안중근·이재명 의사의 의거를 숭모하여, 한 사람을 죽여 만(萬) 사람을 살리는 것이 의(義)라는 것을 신조로, 만일 적국 일본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우리 독립운동의 통수부인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망명 지사들과 협력하여 웅지(雄志)를 관철할 마음의 준비도 돼 있었다. 오사카에 정착한 의사는 우선 생활문제 해결을 위하여 전지 제작소·메리야스 공장 사원 또는 점원으로 전전하면서 잠시도 시간을 낭비치 않고 야간에는 상공전문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상해로 갈 여비를 마련하려고 절약을 하며 낮에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조 의사는 오사카에 체류 중 월 2회씩 안부의 편지를 보내, 효자이며 훌륭한 남편이기도 하였다.

1927년 11월, 23세인 의사는 일본에서 적괴를 처단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우리와 같이 식민지가 돼 있는 대만으로 가기로 하였다. 여기서도 기회를 얻지 못하면 상해로 갈 것을 내심 결정하였는데, 대만에서 상해로 가기는 용이하였으나 당시 일본에서 상해로 직행은 한인으로서는 용이하지 않았다. 의사는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대만 부귀원이란 차(茶)농장 기사로 몸을 숨겨 월 10원의 보수로 생활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대만에서 고향으로 보낸 편지는 회답을 하지 말라는 것과 보고나서 태워버리라는 내용이어서 태워 없앴다 한다. 이 무렵 의사는 대만인 장천제로부터 도검을 구입해가지고 농장 숲속에서 검술을 연마하였다.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도검을 숫돌에 갈아 칼날에 독극물을 발라 적괴수를 처단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조 의사는 대만에 주둔한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하여 천황의 장인이며 황족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가 특별검열사로 파견되어 주둔군을 검열한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조 의사는 밤새도록 상념에 잠겼다. 대만에서 구니노미야를 처단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상해로 가서 독립지사들과 협의하여 다른 호기를 노리느냐? 조 의사는 상해로 가더라도 이보다 더 큰 적괴를 만나서 처단할 기회는 얻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여기서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때는 우리 독립전선이 내외적으로 가장 불리한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취할 길은 부단히 적괴를 무찌르고 기관을 파괴하여 꺼져가는 혁명적 사기를 앙양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바람직한 의거가 좀처럼 지속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조 의사는 용약하게 검을 들기로 결심하였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 타이중(臺中)시 대정정 도서관 앞, 환영 나온 일본인 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구니노미야는 숙소를 떠나 무개차에 앉아 삼엄한 호위로 도서관 앞에 이르렀다. 이 순간, 의사는 비호같이 달려들어 적괴의 가슴을 향해 검을 힘껏 찔렀다. 그러나 혼비백산한 구니노미야가 엉겁결에 여우같이 몸을 피하는 바람에 칼날은 그의 왼쪽 어깨를 찌르면서 운전사의 손등을 찔렀고, 의사가 다시 칼을 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사는 그 해 10월 10일 적의 형장에서 짧은 생애를 조국에 바쳤다. /고운석 주필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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