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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19>/ 서경덕
평생 은둔하며 학문을 즐긴 대학자
어릴 적 선생이 모르는 것 사색으로 깨우칠 정도 특출
실험적이고 과학적 사고로 유물론적 주기철학 확립
그를 유혹하는 데 실패한 황진이가 제자가 됐다는 野談 유명
입력시간 : 2017. 02.07. 15:41


화담 선생이 배향돼 있다는 개성 숭양서원 입구
서경덕(1489~1546)은 하층 관리직인 수의부위로 있던 서번호의 아들이며,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이다. 그의 어머니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19세 때 선교량 이계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단히 사색적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또 그는 어느 날,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귀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새가 땅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 생각하다가 그만 푸성귀 뜯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화담집』 서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향후 그가 전개해나가는 독특한 학문 수행방법의 모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학문 수행방법은 『연보』에 전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선생이 18세가 되었을 때 『대학』의 '격물치지' 장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학문을 하는데, 먼저 격물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읽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뒤부터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 이름을 다 쓰더니 풀을 발라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하나하나 규명해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평생을 두고 일구었던 유물론적 주기철학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이 같은 학습방법과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에 지쳐 다시는 책을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을 상했고, 이 때문에 21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31세 때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해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 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인종 즉위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회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 사림과 훈척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관료와 지주 계급은 토지 겸병과 사치행각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갔다. 또한 통치계급 내부에서도 토지와 정권을 위한 대대적인 유혈 투쟁이 전개되어 사람들이 대거 숙청되는 4대 사화가 일어난 것도 바로 서경덕이 살았던 이 50년 동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결코 그를 불행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년에는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는 고고한 학자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러 송도삼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로,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의 학문적 요체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히 형체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서구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교되고 있다. 그는 심지어 죽음조차도 생물에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에너지)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 그의 이 같은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이황과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1546년(명종 1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1575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히고 있다.

황진이와 서경덕, 이 두 사람과의 관계를 이상하게 보는 이도 적지 않다. 황진이의 생존 연대도 알 수가 없다면서. 하지만 서경덕, 벽계수 등과 교류한 것을 봐서 중종 때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 출신이다. 그녀의 전기에 대해서 상고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기에 간접 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록은 분량은 많지만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라 내용의 신빙성이 적은 것이 흠이다.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고 전해내려오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보태진 경우도 있어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기록들에 따르면, 그녀는 황진사라는 양반과 진씨 성을 가진 현금이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 두 내용 중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 더 우세하지만 그녀가 기녀로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더 유력시되고 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아름답고 뛰어난 규수로 자란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를 야사는 동네 총각 하나가 그녀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사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황진이를 연모하던 순진한 한 젊은이가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만 하다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젊은이의 어머니가 황진이의 어머니 진씨를 찾아와 자신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달라고 간청을 하지만 진씨는 이 애원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젊은이는 마침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생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기계에 투신한 지 오래지 않아 명성을 얻게 되어 서울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다.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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