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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22)/ 白愚 金相台 의병장
“흔치 않은 의리와 용맹을 겸비한 분”
이강년 의병장 유지를 받들어 10여년 간 日帝 괴롭혀
소백산 등지에서 신출귀몰하며 屠戮하자 倭敵들 벌벌
아군 밀고로 체포돼 단식 13일 만에 순국…향년 49세
입력시간 : 2017. 05.11. 15:03


김상태 의병장 초상화
1895~1945년 독립운동사에서,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그가 사주한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일본의 사주를 받던 친일경장정부는 개화를 빙자하고 단발령을 내렸다. 그때 충의심에 불타던 유생들은 위정척사를 표어로 내걸고 1896년 의병을 일으켰다.

단양 산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운강 이강년이 분연히 재기하여 의기를 높이 들고 의병을 결집할 때, 백우 김상태(白愚 金相台, 1864~1912)는 형제의 의를 굳게 맺은 이강년 의병대장의 막료로서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질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곧 국군이 강제 해산되는 시각이 닥쳐왔다. 1907년 6월 화란국(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主唱)으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됨에 고종황제가 파견한 이상설, 이준, 이위종 대표가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한 사실이 밝혀지자, 소위 통감 이등박문은 고종에 대하여 불경한 언사로 일본을 배척하는 태도를 묵시할 수 없다고 위협하였다. 그는 역신 이완용 등을 시켜 심신과 건강이 미완숙한 황태자 융희(순종)에게 강제로 양위시키고 7적 이완용, 송병준, 조중응, 이재극, 이병무, 임선준, 고영희로 하여 망국적인 한일신협약(이등박문이 임의로 택한 일본인의 한국 관리 취임)을 늑결케 하였으며 이어 괴뢰화한 당시 정부의 소위 군부대신 이병무를 시켜 8월 1일 국군해산식을 자행케 하였다.

지난 2011년 6월 15일 제5회 김상태 의병장 추모문화제에 전시된 김 의병장 유품들
이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비분강개한 나머지 자결순국하니, 이를 도화선으로 서울 장안에서는 진위대 병사와 일본군과의 혈전이 전개되어 남상덕 참위의 전사를 비롯하여 피차간에 약간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 소식이 빠르게 경향 각지에 퍼지자 원주진위대의 특무정교 민극호를 비롯하여 강화진위대의 지홍윤, 연기우 등 전국에 있는 각 진위대 병사들과 몇몇 영관급 장교들이 각자 무기고에서, 혹은 휴대한 무기를 가진 채 병영을 박차고 나와 거의 의병진으로 통합되니, 여기서 항일 무력항쟁은 비로소 항전다운 항전이 전개되었다. 또 전세기말(前世紀末) 이름만 굉장하고 대개 유생과 양반의 진장으로 등장하였던 전기 의병(병자의병)과는 판이하여, 의병장에 양반이니 유생이니 하는 봉건적인 진부한 양상과 관념은 대개 불식되었고, 대부분 반봉건성을 띠고 여민 의병장이 배출되어 모두 똑같은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의무를 다하려는, 문자 그대로 국민의병으로서 항일 구국제단에 생애를 기쁘게 바치려는 가치관의 소유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전남 보성의 안규홍 의병장은 남의 머슴살이(보성 말로는 담살이)를 하고 있던 자로, 애국심에 공명된 동료들을 모아 의병진을 편성하여 적을 전율시키고 의병전선에 이름을 떨쳤다. 신돌석 의병장도 영덕의 미천한 농가 출신이나 청사(靑史)를 빛낸 의병장이며, 홍범도 의병장도 평북 농가 출신으로 금광에 종사하다 사냥으로 생계를 잇던 분이나, 의병항쟁에서 왜적을 다수 도륙하여 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려 항일무력전선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최고의 명장으로 쌍벽을 이룬 분이다.

김상태 의병장은 그가 최후를 마칠 때까지 10여년간 줄기차게 왜적을 괴롭힌 공적으로 보나 기간으로 보나 의병장으로서는 흔치 않은 의리와 용맹을 겸비한 분이었다. 이강년 의병대장은 의병으로서 실전에 있어서 가장 많은 적을 처단하고 전후 13년이란 긴 세월을 줄기차게 구국전선에서 싸운 분이다. 휘하에 김상태 의사 같은, 의리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 분이 있으므로 큰 힘이 되었으나, 1908년 6월 4일 적의 유탄에 맞아 기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청풍 금수산에서 체포되어 9월 19일 54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김상태 의사는 그 유지를 받들어 일월산, 소백산 등 각지를 전전하면서 신출귀몰하는 작전으로 왜적을 수없이 도륙하여 적을 전율시키면서 용명을 떨치다가 태백산으로 들어가 적세를 살피더니 대세가 불리함을 판단하였다. 적을 현혹시키기 위해 일단의 의병을 해산하고 은근히 부하 병사들을 시켜 게릴라 전법을 써서 적을 크게 괴롭히면서 암암리에 재기의 기회를 엿보면서 지냈다. 그러나 이 무렵은 경술국치 이후라 흉적의 행패가 더욱 심해져서 우리 민족이 일체 기능을 상실한 때였다. 그럼에도 북(北)에서는 채응언 의병대가 강원, 함경, 평안도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왜적을 괴롭혔고, 남(南)에서는 오직 김상태 의병장이 “싸우다가 망한 나라는 반드시 나라가 회복할 날이 있다”는 신조와 의리를 위한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에 흉적은 방을 붙여 김상태를 체포하는 자에게는 오백금(五百金)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김상태 의사와 같이하던 우가(禹哥)라는 자가 일본에게 자수하여 “상금을 주고 벌을 주지 않는다면 김상태 체포에 협력하겠다”고 자청, 마침내 김 의사를 꾀어내어 적에게 체포당하게 만들었다. 적은 김 의사를 체포하고도 약속한 상금을 우가에게 주지 않으니 김 의사는 적을 꾸짖어 ‘속히 상금을 주라’고 하면서 추호도 밀정 우가에 대해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김 의사의 체포 전말을 일제 문헌에서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작년(1911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행한 연합토벌에 즈음하여 경상, 강원, 충청 3도에 걸쳐서 소백산맥을 근거로 하고 살육-약탈을 심하게 한 적의 수괴 김상태의 소굴로 인정되는 순흥지방 약 70리 부근은 중대의 수사 구역이 되므로, 일단 괴수 김상태 검거에 노력해도 얻은 바 없이 마침내 토벌 중 고심-노력한 결과는 물거품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다음해 3월 16일 실전 중위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음. 김상태의 거처가 판명되어도 포박할 시기가 못됨. 수비대의 이동 관계를 귀대에 인계하고자 하니 이를 위해 시급히 장교를 출장시키기 바람. 속히 회답 요. 3월 18일 대대장으로부터 다음의 전보 명령을 받았음. 육군 보병 대위 종편겸. 이상 제천 수비대장 실전 중위로부터 김상태에 대한 정황 중계를 위해 명일(19일) 영천발 왕복 5일간 예정으로 제천 출장을 명함.>

이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우종응과 그의 아들 선제, 장복구 등의 밀정이 적을 안내하여 순흥군 석천포라는 벽지에서 불세출의 용남 김상태 의사를 적에게 체포되게 하였다. 김상태 의병장은 1912년 7월 28일 단식한지 13일만에 옥중에서 순국하니, 향년 49세였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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