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8일(월)
HOME 커버스토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국제 스포츠 여성.가정 건강 이웃 전국

이동하기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34>/ 規堂 安炳瓚 선생
명성황후 시해 계기로 항일투쟁 투신
두 차례 홍주의병 궐기의 실제적-정신적 지주
“부하들과 생사 함께…” 적 피하지 않고 무저항 被逮
일제의 유혹 배격하고 孤節을 지키다 75세에 영면해
입력시간 : 2018. 06.26. 09:41


명성황후(1851~1895)의 시해 현장인 경복궁 건청궁의 구한말 때 사진. 안병찬 선생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항일투쟁에 몸을 던진다.
1895년에 일어난 을미의병과 을사5조약 늑결을 계기로 일어난 병오의병 항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홍주의병은 거사 진행 과정에서 색다른 특징을 갖는다. 홍주(洪州) 을미의병은 창의대장으로 추대된 관찰사(도백) 이승우의 배신으로 일전도 겨루어보지 못하고 안병찬·김복한·이설 등을 비롯한 중심인물들이 모두 체포되어 무력항쟁은 말뿐으로 아무 흔적도 남김이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그 뒤 10년이 지나서 일어난 병오(丙午, 1906년)년 홍주의병항쟁은 단기간일망정 홍주성을 완전히 점거하였다. 그러나 조선통감 이등박문이란 놈이 신경질적으로 장곡천 사령관을 시켜 대군을 급파하여 홍주성을 침공케 한 결과, 살신성인의 기백으로 정신무장한 우리 의병이었으나 적의 물리적 힘에 눌려 단 한번의 전투로서는 드문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도 많은 순절자를 단시간에 내게 된 이면에는 그 시대 그 지방에서 인인지사(仁人志士)를 배출한 중에서도 정신적 지주로서 규당 안병찬(規堂 安炳瓚) 선생 같은 어른들이 기라성처럼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성읍 대수리를 지나가다가 구백의총과 그 옆에 세워진 위당 정인보 선생의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문'을 읽어본다면 눈물을 금할 수 없으리라.

홍주의병은 전기-후기의 2회가 있었는데, 전기는 1895년 국모 명성황후 시해 참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김복한·안창식·안병찬 부자와 이세영·이설·이근주(경술국치에 자결 순국) 의사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으나, 창의대장으로 추천되었던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고자질하는 바람에 일전도 겨루어보지 못하고 안병찬·김복한 등 주동인물이 모두 왜놈에게 피격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병찬 선생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옥중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감추어 가지고 있던 비수로 자기의 목을 찔러 선혈이 마룻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 감방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며 선생을 부축하고 솜으로 막아 출혈을 제지시키며 가료를 하자 처음에는 절망적이었다가 겨우 목숨만은 회생하였다. 안 선생은 곧 혈서를 쓰고 간수를 불러 눈을 부릅뜨며 배반자(친일무리) 이승우에게 전하라고 호통을 쳤다. 간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였으나, 위엄 있는 분부에 관찰사 이승우에게 달려가 혈서를 전달하였다. 옆에서 시종 간호를 맡아하던 임승주는 안 선생이 깨어나자 생명을 유지키 위해 간곡히 음식을 권하며 "선생의 높은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아직 생명이 유지되어 있으니 자중하시어 계시다가 춘부장(안창식)을 뵈옵는 것이 도리인 줄 압니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같은 감옥 다른 방에서 신음하고 있는 선생의 부친이 연로한 몸으로 고생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고생하는 아버님을 남기고 아들이 먼저 죽는다는 것이 불효라는 뜻이다. 임승주의 말에 선생은 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부자가 함께 적과 대결하다가 함께 영어의 몸이 되어, 차디찬 감옥 마룻바닥에서 신음하는 늙은 아버님을 생각하면 오장이 끊어진다. 하염없는 눈물만 흐른다.

시간이 흘러 1월 31일 서울에서 왜병과 관군 1000명을 인솔한 신우균이 홍주성에 도착하여 먼저 안병찬·김복한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킨 까닭을 물으니, 위정착사의 논리와 왜적의 국모 살해에 대한 복수를 위한 의거임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니, 신우균은 듣기만 할 뿐 함구무언이었다.

마침내 섣달 그믐날(1896년 2월 13일) 감방에 갇혀 있는 죄인들을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죄인들(정치범)을 모두 불러내어 경무청 앞뜰에 줄지어 앉혔다. 아침햇살은 따뜻하였으나 쌀쌀한 바람이 불어 꽤 추웠다. 이때 감방을 달리하여 서로 대면할 수 없이 긴긴 시일을 보내던 부자가 대면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모두 쇠약하여 눈은 쑥 들어가고 얼굴은 초췌하였으며, 그중에도 안 선생 부자의 대면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하고 극적인 장면이었다.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랴. 창자가 끊어지는 심정이었으리라. 아들의 마음 역시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서 일부러 형극의 길을 걷게 된 부자의 모습은 태연자약하였다. 아버지 안창식 공이 아들 병찬에게 "얘, 부자가 함께 극형을 받게 되면 할 수 없지만, 혹시 둘 중에 한 사람만 처형된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자 아들은 "아니올시다. 아버지 용서하십시오. 소자가 죽어야 합니다. 도의를 실천하다 죽는 것이 소자의 숙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서로 죽기를 다투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지사들은 모두 감격하였다. 압송행렬이 예산 신례원에 당도하였을 무렵, 이승우는 중앙의 명령을 받고 죄인들을 홍주로 되돌려 보냈다. 이는 일본놈의 조종을 받은 갑오경장 정부내각의 총리 김홍집이 친일파로 몰려 피살되고, 친로파 내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홍주로 돌아와 김복한·안병찬 등 6명이 보석되고 그 외는 모두 무죄 방면되었다. 이렇듯이 홍주에서 일으킨 을미의병은 참패하였으나 김복한·안병찬·이설·홍건·이상린·송병직 등은 홍주의 6의사로서 죽백(竹帛)에 올랐으며, 특히 규당 안병찬 선생의 고매한 정신은 다음 병오 1906년에 일어난 홍주의병까지 전후 2차에 걸친 홍주의병항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늑결의 소식을 듣고 안 선생은 '나라는 이제 망했으니, 살아서 무엇 하리'라고 탄식하며 10년 전과 같이 또다시 자결을 결심하였다. 민영환·조병세 열사 등 경향 각지에서 수많은 열사들이 자결순국하였다는 소식이 선생의 심정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웃사람들과 문인들이며 동지들이 달려와서 “어찌하시렵니까,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선생 혼자만 가시려는 것이 정도입니까, 살아서 구국항쟁에 앞장서시는 것이 정도입니까” 하면서 만류하니, 차마 거절 할 수 없어 마음을 가다듬고 구국항쟁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이 정도라고 새삼 결심하였다. 그러니 신도현·안항식·채광묵·안병림 등이 안 선생의 수족이 되어 뒤를 따랐다. 홍주에서 박창로·이직·신보균·유준근·김상덕·최선재 등 덕망 있고 용기 있는 지사들도 합세하여 홍주를 중심으로 모여든 군중이 1000명이 넘었다. 건장한 체구의 위엄이 당당한 안병찬 대장이 선두에 서고 장사진을 이루어 홍주성 밖에 다다라서 당시 홍주군수 이교석에게 문을 열고 의병에 참가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교석은 처음에는 응할 듯 하다가 일본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이고 있었다. 의진은 하는 수 없이 홍주성 동북쪽 산 언덕에 진을 치고 하루저녁을 기다리기로 했다. 때는 3월 15일 저녁이었다. 그러나 적의 무자비한 총포 앞에 다시 뒷동산으로 후퇴했다. 그리하여 시내를 사이에 두고 대진하여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원체 근대적 예리한 장비로 중무장한 적인지라 많은 희생자만 나게 되니 안 대장은 후일 재기를 기약하고 일시적 해산을 명하였다. 의병들은 각기 귀가케 하고, 화성에서 나온 의병 안병찬·채광묵·이창로는 화성면 합천으로 옮겨가기로 하여 안 대장과 채광묵은 일시 귀가하려 했으나, 졸지에 왜군이 닥쳐와 많은 의병이 적의 마수에 걸려 피체되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안 선생은 “부하들이 체포되었는데 나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 하면서 닥쳐오는 적을 피하지 않고 무저항으로 피체되었다.

제2차 홍주성전투는 안 대장이 총지휘한 제1차 홍주성전투가 끝난 지 두 달이 지나 민종식을 총지휘자로 하여 보다 치열하게 10일간이나 성을 완전히 점령, 적을 당황케 하여 대군을 파견케 할 정도로 의병항쟁사에서 두드러진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국한 채광묵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용사들은 대개 안병찬 선생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아 사생취의의 고매한 정신을 이어받은 분들이었다.

안 선생은 1854년 5월 3일 홍주군 홍구수면 신정에서 순흥안씨 창식공의 아들로 태어나, 십여세에 시서와 제 경서를 통독할 정도로 두뇌가 탁월하였고 고매한 선비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즉 을미사변 때부터 구국운동에 나서 홍주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일제 무리의 모든 유혹을 배격하고 고절을 지키다가 1929년 6월 2일 영면하였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기사 목록     프린트 화면     메일로 보내기     뉴스 스크랩    


굿뉴스피플 만평
<교육칼럼> 또 하나의 경로석
돈, 박물관이 코인을 만난 세상
<청강의 세상이야기> 왕이 후궁에게 교…
왕이 교접의 법도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고 하문하자 후궁이 대답한다. 평소에 단련…
<우수 농협을 찾아서> 신안…
신안 임자농협 주광옥 조합장은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 사람/공무원 화가 윤창숙씨
만화를 활용한 지방자치단체의 홍보기법과 효과 등을 종합 분석한 을 펴내 관심을 모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