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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36>/ 時堂 呂準 선생
만주에서 ‘교육+항일투쟁’ 광복대업 매진
민족교육 온상인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들다
일제의 눈초리 쏠리자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해
백두산록에서 의문의 린치를 당한 후 70세에 타계
입력시간 : 2018. 07.17. 14:42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의 경고문.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우리 민족의 강력한 항일운동 전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시당 여준(時堂 呂準) 선생은 1862년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죽릉리에서 태어났는데, 영민하여 장래가 크게 촉망되었다. 선생이 세상에 태어나니, 임술년을 전후한 시절은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진주의 민란을 비롯하여 충청·전라·경상도 각지와 제주·함흥 등지의 민란으로 온 국민이 공포에 싸여 안도의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다음해부터는 철종의 서거로 광무(光武)가 등극하여 대원군이 집정하니 그의 완고로 시대사조에 역행하게 되었다. 순치 관계에 있는 이웃 청나라는 소위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으나, 군웅할거로 자중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시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오직 현해탄 건너 섬나라만이 페리 상륙 이후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약육강식의 침략주의까지 본받아 마침내는 우리 조국을 정벌의 대상으로 삼아 계획을 착착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선인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주자학적 성리학에만 몰두하여 남의 좋은 것까지 배척하려 했다. 이 시대의 선인들은 학문이라면 먼저 사서오경이며 육도삼략 등을 금과옥조로 믿고 수학하였다.

시당 같은 선각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이 소년시절에 동문수학한 학우는 이회영-시영 형제와 이상설 등이었다. 당시에 거유 이재촌 선생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는데, 시당 선생이 우당 이회영 선생보다는 5년 연장이고 성재 이시영 선생보다는 7년, 부재 이상설 선생보다는 8년 연장이 되므로 시당 선생이 동문수학 중 접장격이었다. 이 네 분 선열은 후일 모두 조국 광복운동에 혁혁한 업적을 세우신 분들이다. 그 외에 석오 이동녕 선생은 이상의 네 분과 동문수학은 아니나 평생동지며, 그중에서 이시영 선생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징적 존재로서 최후까지 그 법통을 사수했다. 또 1917년 3월 2일 노령 연해주 '니코리스크'에서 부재 선생이 임종하실 때에 참석한 동지는 이동녕, 이회영을 비롯하여 백순, 김항규, 이민복 등 다수다. 이상 언급한 동지들은 운명공동체로서 광복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에는 다소 다른 점이 있었으나 우정과 지조를 지킨 평생동지들이다.

1896년 말 이상설 선생이 성균관 교수에서 관장으로 추대되자 동문수학한 시당 선생을 성균관 직강으로 추천했다. 이관직 저서 「우당 이회영 선생 실기」에 의하면, <단기 4231년(1898년) 9월에 이회영, 이상설, 여준 선생이 작반하여 남산 홍엽정에 올라가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돌아보니, 가을 회포가 강개하여 공연히 옛일을 생각하고 현실을 논하려하니 우심이 불 일 듯 하도다. 슬프다. 주상이 등극한이래 병인양요니, 임오군변이니, 갑신정변이니, 동학난이니, 청일전쟁이니, 을미사변이니 하는 등등의 변란이 거듭 발생하여 백성은 고통과 공포 속에서 위협과 치욕을 고루 겪었다. 그런데 난세에 충량이 난다더니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양재가 나타나지 않고, 세기말적 쇄국주의와 천박한 식견과 우매한 이상에 잠겼으니 어찌 이러한 풍조로써 극렬해지는 20세기에 우리 민족이 조국을 지킬 수 있으리요. 이때를 당하여 우리 2천만 동포는 맹연히 깨닫고 분연히 일어나 민지를 선도하고 정치를 혁신하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풍기가 선명하여져서 자유와 독립이 확보되어 세계 열강과 더불어 어깨를 겨누게 된 연후에야 보국안민을 가기할지라> 했다. 이 무렵, 시당은 부재와 협의하고 부재 사택에 서재를 설치하여 시당·우당·부재·이강연 선생이 상의하고 정치, 경제, 법률, 동서양사 등 신학문을 강구하여 치국안민의 신정강을 준비했다. 이렇듯이 시당은 구식교육을 받은 한학자로서 심기일전하여 온고지신을 염두에 간직한 채 개화운동, 민가계몽사업에 솔선수범한 선각자였다. 앞서 언급한 바, 시당이 해외로 망명하기 전에 성균관의 직강이란 정5품 벼슬에 제수되었던 사실도 있었으나, 이는 이상설 선생이 성균관장으로서 추천하는 정실관계에 끌려서 수락한 것이요, 오랑캐 무리들에게 더럽혀지는 벼슬아치 노릇이 시당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당시 국내에 있어서 항일민족교육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정주 오산학교의 초빙을 받고 교편을 든 사실이 있었으며, 그 뒤 일제의 눈초리가 시당에게 쏠리자, 당시 비밀결사로 구국운동의 중심기관인 신민회원들이 해외로 망명하기 시작하므로 시당도 1906년 부재, 석오 등이 북간도로 망명의 길을 떠날 무렵 북간도 용정촌에 정착했다. 같은 해 봄, 수재는 시당, 석오, 정순만, 박정수, 황달영 등과 협의하고 구국운동의 역군이 될 만한 인재양성 기관을 설립하기로 하여 용정촌에 있는 천주교회의 최병익과 상의하고 그의 소유인 신축가옥을 부재의 사재를 털어 매수한 다음 용정촌의 구지명을 따라 서전서숙이라 명명하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진 동포들의 이해 부족으로 처음에는 간신히 20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부재 이상설, 여시당 등의 총명이 신-구학 간에 통하고 조예가 깊어 그 교수방법에 모두 감동하고 마침내 70여명의 학생이 형설의 공을 닦으면서 이 서숙(書塾)의 선망이 자자하였다. 이것이 재만(在滿)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교육의 효시가 된다. 다음해인 1907년 늦은 봄에 부재가 이준과 같이 헤이그 밀사로 떠나고 시당이 서숙의 전 책임을 맡고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일제무리의 간섭으로 서숙은 폐쇄되어 학생들과 시당을 비롯한 직원들은 눈물로 작별하게 되었으나, 스승과 제자의 도가 완전히 건재하였게 되었다. 비록 단기간일망정 여기서 배운 총준들이 교육계와 광복전선에서 각기 거룩한 구실을 하였다. 그 뒤 시당은 통화현 합의하에서 조직된 부민단에 참가하여 이주동포를 위한 자치기관으로서 민생과 교육 양대 목표를 세우고 교육을 담당하고 활동하고 있던 중에 신흥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감 윤기섭, 교관 김창환, 양규열, 성준용 등과 혁명청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흥학교의 출발은 우당 형제의 물심양면의 뒷받침으로 이루어졌으며, 운영해가던 과정에서 겹친 흉년과 윤치국이라는 학생의 횡사사건으로 절망위기에 봉착된 적도 있으나, 윤기섭 교감이 동포 집을 찾아다니면서 구걸을 해다가 학생들을 먹여 살려가던 피눈물나는 시련을 겪은 끝에 교직원들의 지혜와 집념으로 난관을 돌파하여 신흥무관학교로까지 격상, 수천의 인재가 배출되어 조국과 겨레를 위한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기게 했다. 그럼에도 1920년 가을에는 일제무리의 야만적 광태로 폐교되고 말았다.

시당 선생은 천직이 교육보국이나, 독립전선에서는 항상 겨레의 상징적 존재로서 존경받는 인격자이기도 하였다. 무오년 말에는 대종교의 제2~3세의 교주인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 및 백야 김좌진, 규암 김약연 선생 등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망명지사 39인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에도 서명했다. 다음해 기미 3·1독립운동 발발에 즈음하여 3월 13일 북간도 용정 서전평야에서 1만여 군중이 전개한 독립축하회보다 규모는 작으나 시간적으로는 하루 앞선 3월 12일 유하현 삼원보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 시위 배후에는 시당의 주도하고 치밀한 지도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한다. 그리고 서간도재유동포들의 명으로 된 한국독립청원서도 시당이 작성하여 중국정부를 거쳐서 만국평화회의에 제출케 하였다. 이어 유하현을 비롯한 통화, 홍경, 환인 관전현 등 서간도 각지에 있는 지도자들의 중의를 모아 군정부가 조직되고, 임시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로군정서라 개칭하고 독변에 이상룡, 부독변에는 시당이 추천되었다. 정무총장에는 이석탁(변절), 군무장관에 양규열, 참모장 김동삼, 교관에 신팔균 등이 임명되었다. 작년 3월 국내에서 평화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피에 굶주린 왜의 흉기에 7500여 애국동포가 사살되었다. 이에 우리의 독립투쟁 조직도 만주산야를 혈전장으로 삼고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적에게 대타격을 주었다.

1921년 선생은 액목현에서 김동삼, 이진산 동지 등과 토의를 거듭하고 그들의 연서로 건의문을 작성하여 이진산을 대표로 상해임시정부로 전달했다. 그 내용은 「임정의 개혁안·위임통치를 미국에 청원한 인물을 배제할 것,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 우리들은 임정에서 탈회한다」 등이었다. 그 뒤 시당은 1922년 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액목현 황지강자에 있는 검성중학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장백산록에서 정체 모를 무리들에 매를 맞고 요양 중 1932년 70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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