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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 <140>/ 개혁의 巨頭 조광조
철저한 도학적 실천 통한 왕도정치 실현 꿈꿔
단정한 의관에 절제-절도 있는 언어와 행동 솔선수범
士禍 광풍 속 성리학 심취 “미친놈” “禍胎” 손가락질받아
4년만에 己卯士禍로 스러졌으나 그의 정신은 후대에 막대한 영향
입력시간 : 2018. 12.01. 12:36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 있는 금사정(錦社亭). 탄핵당한 조광조를 구명하던 성균관 유생 11명이 낙향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금강 11인계를 조직했는데, 이때 변치 않는 절개를 다짐하며 심은 것이 사진 속 앞쪽의 동백나무라고 전해진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1488~1544)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훈구파의 과대한 팽창을 막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다시 등용한다. 이는 성종의 균형정치를 모방한 것으로, 사림파를 근위세력으로 양성하여 왕의 입지를 높이고 조정의 힘을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중종이 끌어들인 사림파의 거두는 조광조(1482~1519)였다. 조광조는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정통 도학자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림학자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광조가 김굉필을 만난 것은 17세 때였다. 지방관리로 나갔던 아버지를 따라 희천에 갔다가 무오사화로 인해 그곳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순천으로 이배되기 전까지 2년 동안 그에게 철저한 도학주의적 실천사상을 가르쳤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학적 탁견에 매료되어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로 젊은 나이에 사림파의 영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무오사화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리학을 꺼리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성리학에 심취한 조광조를 보고 '미친놈'이라거나, 화를 잉태하고 있는 놈이라 해서 '화태(禍胎)'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성리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욕하는 모든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은 채 철두철미한 도학적 실천운동에 주력했다. 의관을 단정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행동에서도 절제와 절도를 분명히 했고, 언어생활에도 규범을 두어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이러한 실천운동이 익숙해지자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29세가 되던 1510년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리고 1515년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시라는 관직에 임용되고, 그해 가을 증강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거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이때부터 4년 동안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쳐나갔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성리학을 정치와 민간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철저한 도학 사상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조광조의 의견을 수렴한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단순히 신하와 임금 사이를 넘어 동지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분명한 사리 판단과 절도 있는 행동, 그리고 눈치를 살피지 않는 직언을 좋아하여 그 자신도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우선 훈구세력들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 역시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훈구세력을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한 모리배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훈구세력의 척결이 곧 정치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조정은 어느새 반정 공신파와 신진사림의 대립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1517년 조광조는 드디어 그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 개혁작업은 향약의 실시였다.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사회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개혁작업은 현량과의 도입이었다.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제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조광조가 신광한, 이희민, 신용개, 안당 등의 찬성을 얻어 추진한 현량과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현량과는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 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지조, 생활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의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렇게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 사항을 종합해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 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 향약과 현량과 실시 이외에도 조광조는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 여악(女樂)을 폐지했으며, 내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 질서와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자의 「가례」와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 같은 일련의 개혁은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리학적 왕도정치 실현의 전초기지이자 사림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향약은 실시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다. 당시 실시되었던 향약은 전통과 조화된 자치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에 치우친 당국자들에 의해 선도되는 관주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광조 자신도 지적하였듯이, 향약의 실시를 관에서 철저히 규제하고 강제하였던 것은 향약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이런 강제성은 오히려 민간의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음 문제는 비록 향약이 유포되긴 했으나 이를 지도하고 이끌만한 인재가 양성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역으로 관리들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민간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향약의 실시에 따른 이 같은 문제들은 조광조 자신의 지적처럼 너무 급작스럽게 민간에 유포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는 관이 주도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민간주도의 향약을 위해 보완책을 마련하려 했으나 기묘사화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향약 이외에 현량과에서도 부작용이 나타났다. 현량과 실시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 한결같이 조광조를 추종하는 신진 사림파였기에 등용 기준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림세력의 힘이 강화됨에 따라 조광조의 개혁 방향이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개혁 성향은 마침내 중종의 정치행위까지 간섭하게 되어 왕을 철저하게 성리학적 규범에 맞춰 생활하도록 강권하게 되었다. 때문에 중종은 점차 조광조의 경직된 도학사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압박은 그칠 줄 몰랐다. 그 압박은 마침내 중종 초기에 형성된 정국 공신이 너무 많다는 비판으로 치달았다. 이는 사림파가 훈구세력 축출을 위해 벌인 정면대결이었다. 그 때문에 조정에는 일대 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림세력이 이길 경우, 조정은 완전히 사림파에 의해 장악될 판국이었다. 이는 중종 자신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종은 사림-훈구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림은 중종을 압박하며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였고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훈구세력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 성향을 두고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했다. 마침 무서운 기세로 세력권을 팽창하고 있는 사림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작업을 감행하였다. 그것이 기묘사화다.

이로써 4년 동안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개혁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파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대를 거쳐 선조대에는 사림이 정치세력의 중심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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