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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경> 공연계 ‘미투 불길’ 후 1년

거물 연출가-배우-교수 성추문 드러나며 초토화
곪아터진 부분 도려내고 치유하는 작업 진행 중
입력시간 : 2019. 03.10. 11:21


지난해 2월 19일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성추행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윤택 전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지난해 1월 29일 서지현(46)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부부장검사가 불을 붙인 '미투' 운동이 공연계를 불태웠다. 거장으로 인정받던 연출가, 유명 배우, 존경의 대상인 교수 등의 성추문이 드러나며 공연계는 초토화됐다. 1년이 지난 현재, 나름의 방식으로 곪아터진 부분을 도려내고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최대 직격탄 맞은 연극계

공연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가장 큰 미투 직격탄을 맞은 분야는 연극이다. 단원들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윤택(67)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을 비롯해 연극계에 고발이 쏟아지자 곪은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 전 감독에 대한 판결은 미투 운동으로 고발된 사건 중 첫 실형 사례다. 미투 운동의 진앙지인 연극계의 취약한 구조를 감안한 판결이라고 연극계는 보고 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가와 연출자로 큰 명성을 누렸고, 단원들뿐만 아니라 연극계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며 "이 사건 피해자들 대부분이 별다른 사회경험도 없이 오로지 연극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피고인 지시에 순응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권력구조로 인한 불공정한 계약 관행, 인권 침해 등 부당노동행위가 쌓여 예술계 성폭력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2월 25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서 성폭력 피해 배우들의 미투(#MeToo)운동을 지지하는 '연극뮤지컬관객 #WithYou 집회' 참석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는 행사 주최측의 피켓.


2015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당시 연극인들이 1년간 예술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평균 수입은 1285만원에 불과했다. 인기 배우를 포함한 평균일 뿐 대다수 배우들은 최저소득 이하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극단을 좌지우지하는 자가 일자리를 빌미로 한 성폭력을 가능케 하는 구조다. 특히 이 전 감독이 이끈 연희단거리패 같은 극단 체제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다. 젊은 단원들이 단체에 만연한 악습에도 불구, 쉽게 벗어날 수 없게끔 한다. 사실상 저임금을 강요받는 '열정페이'가 난무한다. 공연계 관계자는 "연기 지망생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웬만한 소속사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다"면서 "쉽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 극단인데, 열악한 극단에서는 처음부터 '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이 전 감독 같이 몇몇 권력자가 연극판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까닭은 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극계는 불투명한 구조 탓에 정확한 시장 규모를 가늠할 수 없다. 관객수와 티켓 판매량 등 공연시장에 믿을 만한 데이터를 구축해주리라는 기대를 모은 공연계 통합전산망 구축은 지지부진하다. 공연계의 산업화는 여전히 요원하다. 이 전 감독에게 실형은 마땅하다는 연극 기획자는 "전문가들조차 대학로에 극단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 "시장 규모가 작다 보니 일반인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이윤택보다 덜 유명한 사람이 미투 대상자였으면 공론화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감독은 항소심에서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어떤 변화 일고 있나

미투 직후 공연계에서는 성추문 가해자들이 배우나 스태프로 참여하는 공연들에 대한 관객들의 보이콧 움직임이 일었다. 연극·뮤지컬 관객이 중심이 된 '연극·뮤지컬관객 #위드유'측은 공연계 성지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미투를 응원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성추문 피해자들에게 공감하고 함께하겠다는 뜻을 담은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하겠다) 운동도 폈다.
성폭력을 예방하고 교육하기 위해 연극계에서 펴낸 책 '불편한 연극'.


이런 운동에 힘입어 작년에는 여성 관객이 많은 뮤지컬에서 페미니즘 열풍이 불었다. 여성 혐오에 맞서 문제의식을 갖춘 작품들이 여러 편 공연됐다. 재작년 공연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창작뮤지컬 '레드북'은 미투 바람을 타고 지난해 초 다시 무대에 올랐다. 신사의 나라 영국, 그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빅토리아시대를 살아가는 '안나'라는 기념비적인 여성 캐릭터로 호응을 얻었다. 스페인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미국 뮤지컬 작곡가 겸 극작가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베르나르다 알바'는 40대부터 2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10명으로만 출연진을 꾸려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라이선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와 '번지점프를 하다' 등은 여성을 그리는 부분에서 관객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을 줄이거나 변경했다. '페미니즘 창극'을 표방한 '우주소리'는 소녀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때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진취적인 세계관을 보여줬다.

연극계는 성폭력을 예방하고 교육하기 위한 책을 최근 펴냈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은 서울연극센터와 대학로 연습실 등지에서 '불편한 연극'을 배포하고 있다. 서울 외 지역에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이들을 위해 우편으로도 보낸다. 지역 예술학교와 관련 학과, 극단, 연극 단체 위주로 나눠준다.

공연계 연출가의 상당수는 남자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여자배우나 스태프가 권력 관계에서 취약한 상황에 지속해서 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흐름을 깨트리려는 노력도 있다.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남산예술센터는 올해 시즌 프로그램으로 선보이는 연극 6편의 연출 성비를 3대3으로 맞췄다. 미투 이후 고민을 반영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묵자와 초혜황이 모의전을 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삼은 서민준 원작 '묵적지수'는 연출자로 남성을 떠올리기 쉬운데, 여성 연출가인 이래은이 맡는다. 펄떡이는 소녀들의 생존기인 연극 '고등어'로 주목받은 연출가다.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은 "여성 연출이 갖고 있는 남다른 시각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NP gnp@goodnewspeople.com        NP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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