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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人奇事<96>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조의 아들로, 둘 다 8년여 청나라 볼모생활
장남 소현 ‘親淸’ 미운털 박혀 부친이 독살했다는 비운의 주인공
차남 봉림 아버지의 ‘大明사대주의’ 코드와 맞아 결국 왕위 계승
입력시간 : 2019. 03.10. 11:23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재위 1623~1649)와 첫 왕비 인열왕후가 함께 잠들어 있는 장릉(사적 제203호). 경기도 파주에 있다.
1637년, 청은 병자호란을 종결짓고 돌아가면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아갔다. 그중 셋째아들 인평대군은 이듬해에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야 귀국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둘 다 청에 8년여 동안 함께 볼모로 잡혀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당시 청에 수입된 서양문물을 대하면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익혀나간 데 반해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고, 또한 서양과 과학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게 천주상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적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 덕택으로 소현세자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단계에 있음을 알았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문물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對明)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경험들은 반청 사상을 더욱 강하게 굳히는 원인이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에서의 생활상은 역관이나 사은사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도 전해지게 되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가 서양 종교인 천주교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을 듣고 몹시 분노했다. 게다가 귀인 조씨와 김자점 등이 소현세자가 청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다고 이간질을 함으로써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즈음 청나라는 명을 멸망시켰고, 세자 일행을 풀어주었다.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와 두 아들을 데리고(큰아들 석철은 조선에 있었던 듯함) 1645년 2월에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인조는 전혀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시 인조는 청으로부터 철저한 반청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반면에 소현세자는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은 조선과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인조와 상의하지 않고 심양의 조선관에서 소현세자와 상대하기를 원했다. 청의 이런 태도는 인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김자점, 귀인 조씨 등이 소현세자가 입국하면 왕위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인조의 경계심을 더욱 높여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이런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인조를 찾아뵙고 청의 내부 사정과 서양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인조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고, 그가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심하게 분개하며 벼루를 들어 그의 얼굴을 내리치기까지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병의 원인이 울화통인지 아니면 단순한 열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그를 진찰했던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때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이 그의 열을 내린다고 세 차례 침을 놓았는데 그는 이 침을 맞더니 3일만에 죽고 말았다.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가 된 조선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놓고, 진기한 물건들을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녀 조 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이형익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는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간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후 소현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셋째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반청감정 때문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모화사상은 병자호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하는 치욕까지 겪게 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나라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던 것이다. 인조는 이 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한데 본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에서 가지고 온 서양문물을 찬양하며 조선이 변해야 함을 역설했다. 인조에게는 그런 세자가 청의 첩자 정도로 인식되었을 터이고 배반감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아들을 독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제거되자 그때까지 심양에 남아있던 봉림대군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1645년 5월이었다. 인조는 한 달 뒤인 6월에 세자 책봉 의사를 밝혔으며, 9월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혔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했지만, 소현세자와는 달리 대명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감정이 자신의 대명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은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봉림대군이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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