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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친일 재산 처리, 기독교 방송 등 특혜
불교계 갈등은 정치적 이용 개신교는 우대
입력시간 : 2019. 06.15. 11:22


LA 이승만 건국대통령 탄신144주년 기념식
이승만(1875~1965)은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全州),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

어려서 서울에 이사하여 도동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에 입학 신학문을 공부하고 1895년 8월 배재학당 영어교사가 되었다.

1897년(광무1)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독립신문’을 발간하자 가담하여 신문에 논설을 집필하면서‘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투신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설치를 주장하면서 정부측 폭력단 황국협회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강압적인 수사와 7년간 옥고를 겪고 1904년 출옥했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제에게 매수된 주미공사관 서기 김윤정의 방해로 뜻을 못 이루었다.

1905년 미국에 머물러 학문을 더 닦기로 결심하고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수료,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해 9월에 귀국, 이상재 등과 함께 기독교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들을 지도하기에 전력을 하다가 1912년 다시 도미했다. 이때부터 30년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미대륙과 하와이, 상해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7년 세계약소민속대표자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박용만을 파견, 1919년 3·1운동 때 국내인사들과 연락하여 거사에 동조하고 이해 4월 10일 상해에 임시정부가 서자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뒤에 다시 미국에 돌아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설치,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했다. 1945년까지 워싱턴·하와이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외교투쟁 외교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아 그해 10월에 귀국, 독립중앙협회를 조직하여 반공·반탁을 주장하면서 민족주의 자주독립 노선을 전개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의장이 되고 이해 8월 정부수립과 동시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계속 대통령직에 재직, 1960년 3월 대통령에 4선되면서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4·19혁명으로 하야, 이해 5월 하와이에 망명 1965년 하와이에서 병사했다.

그런데 2011년 한국방송(KBS)가 방송하기로 한‘이승만 특집’ 다큐멘터리가 종교적 논란에 휩싸였다.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소장 법안스님)가‘불교와 대통령 이승만’을 주제로 종책토론회까지 열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종 총무원청사에서다. 박희승불교사회연구소 사무국장의 사회로 열린 토론회에서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 강사인 이재헌 박사는 발제에서 이승만의‘일방적인 친 기독교 정책’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여기에서‘기독교’란 가톨릭을 제외한 개신교를 말하고 있다.

이날 토론 참석자들은 대부분 이 박사의 발제가 이승만 종교 편향의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증거 자료들을 최초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이승만은 애초 유학가문에서 자랐고 그의 모친은 독실한 불자였으나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재필과 미국 선교사들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해 기독교 교육 및 선교활동에 종사하면서 한국을 완전한 예수교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것이 발제자의 주장이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 출석했으며 1956년 명예장로로 추대됐다고 한다. 발제자는 이승만이 불교의 사찰령이나 포교규칙 철폐에 대한 불교 쪽의 요구는 묵살한 대신,‘일본종교단체의 재산’즉 적산처리 과정에서 기독교에 특혜를 주고, 1945년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한 점 등을 종교 편향 보기로 꼽았다. 기독교계의 요구를 수용해 형목제도를 만들어 형무소 교화사업을 기독교가 전담하도록 하고 1947년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선교방송을 하게한 점 역시 마찬가지다. 국기 우상화 반대운동을 펼쳐 국기배례를‘주목례’로 바꾸고, 군종제도를 실시해 군 선교를 하도록 하고 또 경찰 선교를 시행하고 기독교청년회(YMCA) 등 기독교 단체에 막대한 후원을 하고 1954년 기독교방송국을 1956년 극동방송을 설립하게 한 것 등도 기독교 우대정책 사례를 들었다. 이에 따라 군의 경우 1950년 군종창설, 당시 5%에 불과했던 군내 기독교인 비율은 1956년 15%까지 상승했다는 것이다. 불교의 군승제도는 1968년에 시행됐다.

발제자는“기독교계는 한국의 장치 자체를 장악해 기독교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국적인 선거운동 조직을 만들어 이승만의 대통령 재추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미군정과 제1공화국의 기독교우대정책으로 인해 해방 직후 남한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했던 기독교 인구가 1960년엔 7.5%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기독교가 1960~70년대 산업사회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지만 그 기반이 미군정과 제1공화국 시기에 다져졌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발제자는“이승만 정권이 1950년대 비구(독신승)·대처(부인이 있는 승려)의 분쟁에 깊숙이 개입해, 비구 쪽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가 되어 불교계갈등을 자극하고 확대했으며, 김창숙이 있는 유도회의 분쟁을 사주하고 천도교와 대종교 등 민족종교에 대한 감시와 통제로 교세를 약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이어“이승만이 8차례나‘정화 유시’를 통해 비구 쪽을 지원한 대가로 불자들은 경무대 앞에서 북진통일 시위를 벌이고, 1956년엔 비구 대표들이 경무대를 찾아 대통령 재출마를 호소하고, 3·15부정선거에도 조계종단이 체계적으로 동원되었다”며 “무엇보다도 불교계가 내부종권다툼에서 국가 권력에 의지하거나 폭력을 동원해서라고 자신들의 목적을 쟁취하려고 한 점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이용하기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고 불교계에 일침을 가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뉴데일리’이승만연구소의 이주영(건국대 명예교수) 공동대표는“이승만은‘천상천하의 질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도 내 모친의 종교는 바꿀 수 없다”며“모친의 종교인 불교를 아껴 대통령이 되어서도 종종 절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이승만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나라를 이끌어가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1950년 농지개혁법에 의해 사찰들이 소유한 농지를 잃게 되었을 때 이미 농민들에게 분배된 사찰의 농지를 초법적 조치를 통해 다시 환수해 사찰로 돌려주게 하면서까지 불교계를 도왔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은“불교 정화의 명분이었던 왜색불교 퇴치라는 명분은 이승만이 기독교계의 친일인사들을 중용한 것을 보자면 이는 정치적 명분일 뿐이었다”며“불교계가 독자적인 전망으로 정권의 개입을 막아야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은 불교계의 미숙함이자 큰 과오였다”고 지적했다. 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김종인 교수는“불교계의 정치적 의식 빈곤으로 인해 한국불교는 항상 정권에 유린당하면서고 도리어 충성을 다하는 기이한 촌극을 연출해왔다”며“불교가 사회적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인들은 불교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2000년대 이후 불교인들이 사회적 자각을 이루자 비이성적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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