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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을 찾아서> 숙종의 환국 정치
경신환국 -남인이 정치적으로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 장악
원자 책봉 문제 계기로 다시 남인이 정권 장악- 기사환국
경신환국과 기사환국은 정치 옥사였다
입력시간 : 2019. 07.13. 17:22


현충사의 숙종 임금이 사액(賜額)한 현판.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년) 경신년에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을 일컫는다. 남인은 1674년의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의 모후인 명성화우 김씨의 추천에 따라 그녀의 종질 김석주를 요직에 기용하여 남인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김석주의 세력은 남인을 견제할만큼 강하지 못했다. 따라서 숙종 초기는 남인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문에 숙종은 남인의 지나친 성장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런 경계심은 허적의 유악 남용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 허적은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이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그래서 숙종은 허적에게 비가 새지않는 천막을 내어주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미 그 천막을 허적이 빌려간 상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심하게 분노하며 패초(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것)로 군권 책임자를 모두 불러들였다.

사실 그 천막은 군사 물자였기 때문에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혹 필요할 때에는 왕이 선처하여 빌려주는 형태를 취했는데, 당시 군권과 조정을 거의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허적의 권세를 믿고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천막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숙종은 이 일을 남인이 권세를 믿고 왕을 업신여긴 행동이라고 단정하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버린다.

훈련대장직은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서인 김철을, 수어사에는 서인 김익훈을 임명한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서인 김석주가 맡고 있었으므로 보직을 유임시켰는데, 이로써 서인이 군권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인은 설상가상으로 '삼복의 변'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삼복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했던 것이다.

고변 내용을 살펴보면 허견과 삼복형제들은 숙종이 즉위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 보았고, 또한 도체찰살부 소속 이천 둔군에게 몇차례에 걸쳐 특별한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골자였다. 도체찰사부의 둔군을 사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때문에 도체찰사였던 영의정 허적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요소였다.

문제가 되었던 도체찰사부는 효종 대까지는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평화가 정착되던 현종 대에 폐지된 기관이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대륙의 정성공, 오삼계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윤휴, 허적 등의 주장에 따라 1676년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일원화하자고 하였으나, 김석주의 반대로 1677년 6월에 도체찰사부 자체가 일시 혁파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 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국왕 및 궁성 호위부대로 발족한 중앙 군영은 예외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도체찰사부에 예속되지 않았다. 허적이 중앙군영까지 그곳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김석주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이후 1678년 12월 도체찰사부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숙종은 허적을 견제할 요량으로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였다. 비록 도체찰사부에 중앙 군영이 통합되긴 했으나 이들 군사기관은 사실 서인측이 창설하고 발전시켰기 대문에 서인은 그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중앙 군영의 지휘권도 거의 남인에게 넘어가고 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한편 허적의 아들 허견과 복창, 복선, 복평군 삼형제의 모반 행위에 대한 고변의 주요내용이 도체찰사부의 군사를 동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역모에 연루되게 되었다. 그래서 허견과 삼복 형제뿐만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 오정위 등 남인 중진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또한 고변자 정원로 역시 역모자의 하나로 지목받아 처형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대폭 등용되어 조정은 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기사환국(1689년) 기사환국은 후궁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숙종의 정비는 원래 서인 노론의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였으나, 그녀가 1680년에 죽어 숙종은 노론 민유중의 딸(인현왕후)을 계비로 맞아했다. 그런데 그녀는 원자를 낳지 못했고, 숙종이 총예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소의 장씨가 낳은 아들 균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데, 서인측은 이를 반대하였다.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 호조판서 유상운, 병조판서 윤지완, 공조판서 심재, 대사간 최규서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난지 두 달 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발은 누구러들지 않았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송나라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되자 그때 비로소 태자로 책봉하여 후사를 이은 고사를 예로들며 후궁 소생인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재차 강조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반대 상소를 접하고는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명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분노하였다.

그래서 그는 승지 이현기와 윤빈, 교리 남치훈, 이익수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목창명 등 남인계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 김수항, 김만중 등도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숙종은 본질적인 원인이 민비에게 있다하여 다시 중전을 폐비하려 했다. 그러자 노론측이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숙종은 그 주동자인 박태보, 이세화, 오두인 등을 국문한 후 위리안치하거나 귀양보냈으며, 그해 5월 민비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한편 원자 균을 세자에 책봉했다.

궁인 출신의 후궁 장씨는 1686년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을 거쳐 소의에 봉해지고, 왕자 균을 낳은 후 그가 원자에 정호되어 이듬해 세자에 책봉되자 그 해에 중전이 되었다. 그녀가 일개 궁인에서 왕비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의 동생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항의 힘이 많이 작용했다.

조사석은 남인과 연결을 맺고 있었고 동평군 항은 궁중과 연결을 맺고 있었기에, 장씨는 조사석을 통해 남인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동평군을 통해 종친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씨에게 조사석을 연결시켜준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장씨의 어머니는 조사석과 한때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였는데, 이 때문에 장씨가 조자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한편 동평군 항을 끌어들인 사람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였다. 동평군 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를 맡고 있었기에 궁중을 자유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장희재는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하였다. 왕자 균이 원자가 될 당시에 남인의 민암, 이의징 등이 이들과 은밀히 손을 잡았다.

이때문에 원자 정호 문제로 서인이 대거 축출 당하자 남인이 다시 등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남인 세력과 장씨가 은밀히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서인과 인현왕후를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환국과 인현왕후 폐출사건은 이러한 세력 구도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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