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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을 찾아서> 조선에 투항한 사야카(김충선)
조선에 투항했지만 일본서도 기린다.
와카야마에 기념비 건립, 자민당 실세 니카이가 비문 써
배신자 아닌 명분 없는 전쟁 맞선 평화주의자로 재해석
입력시간 : 2019. 08.19. 14:55


소설 항왜 김충선
지금으로부터 427년 전인 1592년 4월13일. 가토 기요미사의 우선봉장 사야카(沙也加)는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부산에 상륙한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침략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초반 왜군은 연전연승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흘이 되도록 사야카의 군사는 움직임이 없었다. 일주일이 되던 날, 경상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사야카의 편지가 도착한다. "이 전쟁은 대의명분이 없다. 조선에 투항하겠다" 사야카는 적진인 조선의 편에 섰다. 평소 '예의의 나라' 조선을 흠모했다고 한다.

그는 조총과 화약 만드는 법을 조선군에 전수한다.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에도 참전해 72세로 사망할 때까지 조선인으로 살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국을 등지고 조선의 편에 섰던 왜군장수 사야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일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6월5일 한국특파원은 와카야마현으로 향했다.

오사카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90km. 사야카의 비는 와카야마시 기슈도쇼구 경내에 있었다. 도쇼구는 도쿠가와이에야스를 기리는 신사로, 기슈는 와카야마 지방의 옛 이름이다. 도요토미 집안을 무너뜨린 이에야스의 신사 앞에 사야카의 비를 세운건 절묘한 장소 선택이다. 기슈도쇼구의 관리자인 니시카와히데히로는 "기슈지역은 예부터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닛코(日光)에 있는 도쇼구가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과 달리, 기슈도쇼구는 녹색과 붉은색을 주로 사용한 조선의 단청과 매우 닮았다"고 설명했다. 사야카의 비가 한반도와 연관이 깊은 기슈도쇼구 앞에 세워진건 필연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비석이 세워진 것은 2010년이다.

당시 '사야카 한·일 국제심포지엄'이 일본에서 열린 것을 기념해 뜻있는 양국 국민이 모였다. 사야카를 소재로 한 소설 '바다의 가야금'을 쓴 작가 고사카 지로. 김충선의 후손 등도 자리했다. 여기엔 자민당의 유력 정치인 니카이도시히로 당시 총무회장(현간사장)도 있었다. 비문도 니카이가 직접 썼다. 돌은 아시아나항공 박삼구 회장에게 부탁을 해 한국에서 직접 가져왔다. 와카야마를 정치 기반으로 하는 니카이는 사야카가 와카야마 출신이라는 점을 앞장서서 알렸다.

2019년 2월 니카이 간사장의 '절친'인 전라남도 진도출신(지역구 목포) 민주평화당 의원도 와카야마를 찾았을때 사야카비를 방문했다. 비석 앞에는 나무 두 그루가 서로 몸을 꼬듯 얽혀 자라고 있다. 당시 비 건립상황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일부러 이곳으로 정한 것도 아닌데 서로 기대듯 얽혀있는 나무 모습이 한·일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일본에선 처음엔 사야카를 실존인물로 받아들잊 않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해왔다. 그러다가 사야카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1971년 국민작가로 불리는 시바료타로가 쓴 기행문에서 사야카를 다루면서다. '배신자' 프레임에서 '대의 없는 전쟁에 맞선 평화주의자'로 사야카를 재해석하기 시작한 것도 이 이후다. 와카야마 현 청 국제과의 야마시타 요시오 국제기획반장은 "사야카의 스토리는 영화화 예기도 나왔을 만큼 많은 일본인이 용기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야카에 대한 기록은 일본에 남아있지 않다. 조국을 배신한 사실이 밝혀질 경우, 남은 가족들이 곤경에 처할 것을 우려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다만 그가 조총과 대포를 잘 다뤘기 때문에 당시 와카야마 지역 철포부대로 이름을 떨친 사이카 부대를 이끌었던 스즈키 마고이치의 후손이 사야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사이카·사야카로 지역을 활성화하는 모음'의 쓰지다케시 회장은 "도요토미는 죄없는 민중을 잔혹하게 죽이는 것으로 유명하했다"며 "사야카는 도요토미가 전쟁을 벌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조선 역시 그를 받아들이는게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언제 또 배신할 지 모르는 적장에게 이름과 벼슬까지 내린 것은 통큰 결정이었다. 2000년대 한·일 관계가 급격히 개선되면서 사야카는 이른바 '한·일 우호협력의 아이콘'으로 다뤄졌다. 관련 연구도 활발했다. 2012년엔 사야카가 세운 녹동서원이 있는 대구시 달성군에 한일우호관도 개관했다. 일본에선 지금도 쓰지 회장을 중심으로 매년 사아카를 주제로 한 낭독극회를 열고,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사야카의 평화사상 등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쓰지 회장은 "한·일 관계에 항상 나쁜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며 "지금은 강제징용문제 등 여러 어려운 일이 얽혀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한번쯤 사야카 비를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사야카 한국 이름은 김충선

-1571년 일본에서 출생.

-1592년 임진왜란 시작. 가토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왔으나 투항. 자신의 조국인 왜와 맞서 싸움

-1593년 권율과 한준겸의 주청으로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선조로부터 하사받고 자헌대부에 오름

-1597년 정유재란 의령전투에서 공을 세움

-1600년 인동 장씨 장춘점의 딸과 혼인

-1603년 정헌대부 벼슬을 받음

-1624년 일괄의 난을 진압

-1627년 정묘호란 참전

-1636년 병자호란 참전

-1642년 72세 나이로 사망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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