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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외교의 달인’ 서희가 그립다 | | | | 입력시간 : 2019. 09.09. 13:56 |
미국에서 목격한 일이다. 미국 사내놈이 같이 놀던 한국 여자아이에게 발길질을 하여 울렸다. 한국 어머니가 나서서 약한 여자아이에게 발길질한 것을 나무라고 잘못을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이 사내놈이 하는 말이 “게임의 규칙을 어겼기에 벌칙으로 차인 것 뿐”이라면서 사과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굳이 사과받기를 원한다면 치안재판소에 고소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는 과실에 대해 잘 사과하는 나라가 있고 이렇게 잘 사과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 주로 강한 나라의 오만인데 일본은 ‘후안무치’의 대표적인 나라다. 인도도 후자에 속한다.
하녀가 잘못해서 그릇 하나를 깨더라도 그릇이 손에서 빠져나가 깨진 것이라느니, 깨질 때가 돼서 깨진 것이라느니 자기가 깬 것이 아니라고 우기고 과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잘 빌지 않는 문화권에서 과실을 인정하면 그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35년간의 강점과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살상하고 수탈해 간, 엄청난 과실인데 일본천왕은 ‘유감’이란 농도가 묽은 말로 사과하는데 인색했다. 총리 아베는 사과는 커녕 경제보복까지 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갑자기 서희(徐熙)가 생각난다.
‘외교 달인’ 서희가 태어난 942년 고려는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 보내고 낙타 50마리를 굶어 죽게 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한 거란에 강경한 노선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938년 ‘요(遼)’로 이름을 바꾼 거란은 당시 떠오르는 강국이었다. 이로부터 28년 뒤인 960년 중국에 송나라가 들어섰다. 12년 후 서희는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됐다. 한동안 관계 두절 상태였던 송나라에서는 고려 사신을 냉대했다. 이에 서희가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 것은 연진과 거란이 육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송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서희가 51세 때인 993년에는 거란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와 항복을 요구했다. 조정은 무조건 투항하자는 파와 북쪽 땅을 떼 주고 화친하자는 파로 나뉘었다. 이때 서희가 나서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철군 약속을 받아냈다. 고구려 옛 땅인 강동 6주까지 되찾았다.
서희는 국제정세를 면밀하게 분석한 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 침공을 앞두고 고려의 배후 기습을 염려했다. 이런 속내를 간파한 서희는 송나라와의 단교를 약속하며 거란을 안심시켰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고려 조정 내 친송파(親宋派)가 강하게 반대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소손녕에게 내비치며 이들을 설득한 ‘선물’을 요구했다. 그게 강동 6주였다. “당신들과 통교하지 못한 것은 여진이 막고 있기 때문이니 그 땅을 우리가 회복하면 국교가 통할 것이다”
이후 송나라와 단교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상대의 명분을 살려줬다. 거란과 화친한 경위를 알리면서 “군사적 압박 때문에 부득이 했으며 앞으로 힘을 기르면 송과 손잡고 거란을 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민간 교류는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이처럼 그는 상대의 의중을 명확히 파악하고 실리주의 외교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가 공허한 명분론을 앞세우며 마구 칼을 휘둘렸다면 어땠을까. 탁월한 국제 감각과 외교협상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군을 돌려보내며 옛 땅까지 찾아온 그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의 경제 보복 같은 비극이 초래되기 전 서희처럼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외교 전략가가 우리 정부에 왜 없었는가 묻고 싶다. 반대로 나라를 위해 서희처럼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감옥에나 보내고 이 고통을 받는 것 아닌지 돌아보라.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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