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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기사<104> 한국 온 美특사 웨더마이어 장군
해방 후 방한한 특사라 산업재건에 큰 기대가져
좌파 “민생파탄 원인 미군정과 결탁한 민족반역자 농간 탓”
우파 “경제위기 원인 분석보다 반탁과 총선 실시 주장 ”
입력시간 : 2019. 11.22. 09:58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웨더마이어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중국과 남한을 방문한 1947년 8~9월은 미국의 대중정책과 대한정책 모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한국사회 내부적으로도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무언가 새로운 방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미국 정부가 웨더마이어 특사의 방중·방한 사실을 발표한 것은 1947년 7월 중순이었다. 그의 방한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공업기술협회 기관지(공업신문)은 1947년 7월 16일 그의 방한에 대한 기대를 1면 사설로 실었다. 공업신문은 과학인, 기술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 최초의 공업기술신문으로 공광업계, 건설계 소식을 주로 담았던 일간신문이었으나 중요한 정치, 사회 현안이나 국제소식도 다루었다.

“웨더마이어 중장의 ‘멤버’는 재계와 공업, 경제 즉 산업경제의 주요 포인트를 조사하고자 하는데 있어 각각 그 방면의 통(通)이라 할까 사계의 권위를 망라한데 대하여 더욱 기대가 큰 바가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일찍이 경제에 굶주리고 있느니만치 신생 조선의 사업재건에 대하여 전면적 원조를 바라는 바이며 특히 공업국가로서 부끄럽지 아니할 만한 모든 시설에도 유의하여 실제적이요 현실적인 속임없는 실정조사에 착수하여 완전히 인도하여 나아가 세계 안전 평화 및 경제안정 기조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이 사설은 당시 한국사회가 마주한 경제 문제의 핵심을 한마디로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로 정리했고 그 해결방도의 하나인 산업재건에 필요한 원조에서 미국이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명했다.

웨더마이어 사절단은 방한한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이틀에 걸쳐 미군정 당국자들로부터 남한 사정과 한반도 정세를 종일토록 청취했다. 첫날은 남한 정치상황과 한반도 군사정세에 대해서 이튿날은 남한 경제상황과 미소공동위원회 진행상황에 보고와 토론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미군정 경제전문가는 원조가 철회되자마자 남한 경제는 붕괴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 놓았고 점령 당국이 여전히 최소한의 구호차원의 정책밖에 펴지 못하는 입장이라며 소련의 지배로부터 한국을 구하는 것은 실질적인 원조뿐이라고 강조했다. 이틀에 걸쳐 미군정 관리들은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남한 점령 이후 현재까지 상황 전개와 현재 정세 향후 전망을 보고했는데, 사실상 그간의 점령 정책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던 이유를 나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면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던 한국인들은 민생 파탄의 원인과 해결책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민생문제: 폭압과 테러가 이처럼 심한 틈을 타서 모리배가 준동하므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앙등하는데 수입은 적고하니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저의 가족이 8명으로 생활비가 2만원은 가져야 하는데 급료가 겨우 3천원 미만이오니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호구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까딱하면 파면이니 거리에는 무수한 실업자 홍수랍니다.>

위 편지는 1947년 8월 31일 발송되었고 서울 서대문구 홍파동 거주 오윤덕이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오윤덕은 좌익 성향의 시민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 앙등의 원인으로 모리배의 준동을 꼽았다. 극우단체들이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조직적으로 편지를 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좌익 쪽에서도 조직적 편지를 보냈고 그런 면에서 양쪽의 편지 내용을 비교하면 그들의 주장과 그 속에 간직된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좌익 쪽 편지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대체로 미군정 내 친일파의 준동과 그들과 결탁한 모리배의 발호를 강조했다. 흥미롭게도 극우 쪽 편지들 가운데 경제위기 현상을 언급한 것이 없지 않지만 그 원인을 분석하거나 지적한 편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모든 편지가 그저 ‘반탁’과 ‘총선 실시’ 구호를 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민생 파탄과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모리배를 주목한 것은 죄익 계열만이 아니었다.

아래 인용문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어학회를 대표했던 유명한 언문학자 이극로가 1947년 9월 1일 장군에게 제출한 ‘조선국내사정보고서’ 중 ‘경제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생산원료의 엄격한 통제 배급과 함께 생산품의 계통적인 분배로 하여 다소간이라도 합리적인 운영방안을 취한다면 생산도 증진하고 물가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로 생산 원료는 모리배 수중으로 생산품은 간신배 수중으로 입수되어 인민은 도탄에 삐지고 공장은 생산원료의 부족과 입수난으로 곤경에 빠지는 현상이다”

이극로는 당시 민생 파탄의 원인을 ‘생산원료는 모리배 수중에, 생산품은 간신배 수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 줄로 정리했다. 그는 일제 강점 말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4년 이상 옥고를 치렀고, 해방직후 함흥감옥에서 들것에 실려 나왔던 민족주의자였다. 해방 직후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1946년 조선건민회라는 민족운동 단체에 참가하여 그 단체를 이끌었다. 1946년 중반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자 그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한 것은 1947년 봄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무렵부터다. 1948년 4월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남조선과도입법 의원에 관선의원으로 진출한 정이형(본명 정원흠)의 편지는 더욱 적나라하고 신랄하다.

그는 4장 분량의 영문 타이핑 편지를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전달하여 점령 정책의 결함을 조목조목 지적했는데 그 가운데 셋째 항목에서 남한의 경제위기와 모리배 문제를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이른바 미국인 통제 하에 있는 적산들이 모리배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적절한 방법으로 일본인 기업과 공장에 있던 비축물과 재고픔으로 처분했더라면 남조선에서 경제적 불안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물품들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면 남조선에서 혼란과 무질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현재 한국의 경제 사정을 들으셨을 겁니다. 공장의 재고품과 원료는 모두 사라졌고, 기계는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장들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80% 이상의 공장이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우리는 원료, 기계, 기술자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정직한 관리인이 필요합니다. 한국인 가운데 많은 수가 지난 40년간 일제 강점아래서 도덕적으로 밑바닥까지 타락했다는 것을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정직한 토대위에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합니다. 부디 정직한 전문가를 보내시어 그들이 우리 인민들을 정직하게 이끌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패한 관리가 정부의 공무원 자리에 앉아있는 한 어떤 경제적 회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게 되더라도 당신은 먼저 관재처(미군정 내 적산 관리기구) 관리나 과거에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기업과 공장을 관리하고 있는 조선인 관리자들을 모두 엄격하게 심사해야 합니다. 부패한 관리, 사리사욕만 채우려 드는 기업가와 상인, 악명 높은 친일파 경찰이 판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겁니다. 현 정부로부터 어떤 선을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정이형은 3·1운동 참가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1920년대 전반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1926년 4월 중국 길림성에서 정부의 출신혁명가들과 국내의 형평사 계열 활동가들을 연결하여 고려혁명당이라는 진보적 민족주이를 표방한 정당을 창설했으나 1927년 3월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19년간 옥살이를 했다.

1946년 12월 30일 과도입법의원 제6차 본회의에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조사위원회’를 특별위원회의 하나로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74년 ‘민족반역자·일부협력자·전법·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제정을 위한 기초위원회가 설립되었고, 그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법 제정을 주도했으나 미군정이 법인 인준을 거부하여 종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된 지 2년, 점령군 당국자는 물론 남한 거주자 전부가 남한 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서 외부의 원조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토지개혁이나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 처리 등 구조적 개혁도 필요했고, 식량위기 해소,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진정, 재정·금융의 안정, 생산의 재건과 실업자 해소 등 해결해야 할 경제적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전달된 한국인 편지들은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개혁의 주체인가를 묻고 있다.

친일파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였다. 실패하고 말았지만 부일협력배, 전범에 더하여 굳이 간상배를 적시한 이유일 것이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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