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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기사<104> 왕비가 '노다지' 팔아치웠다
민비(閔妃), 美 공사관 알렌에게 운산 금광 선물.
재정 적자 시달리던 고종 매각 적극 추진했다고도…
입력시간 : 2019. 12.20. 14:22


1904년 고종황제의 모습.
기인기사<104> 왕비가 '노다지' 팔아치웠다

민비(閔妃), 美 공사관 알렌에게 운산 금광 선물.

재정 적자 시달리던 고종 매각 적극 추진했다고도…



에드워드 기번은 '역사는 참으로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음과 재난이다'라 했다. 한데 1895년 7월10일 조선 왕실 일등 상궁이 미국 공사관 참찬 아내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엿새 뒤 열린 '개국기원경절' 초대장이다. 조선왕조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다. 참찬 아내 이름은 릴리어스다. 참찬인 남편은 호터스(Horace) 알렌이다. 기원경절 파티는 7월16일 예정대로 열렸다. 한달 뒤 당시 미국공사 존실이 미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7월15일) 조선 국왕이 조선에서 매장량이 가장 많은 운산금광 채굴권을 미국 시민에게 양여했다.'(1895년 8월15일, '한미관계 1896~1905자료집')

그 무렵 미 공사관 참찬 알렌이 일본 요코하마에 있던 본국 기업인 모스에게 편지를 썼다. '내 친구들을 고위직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박정양을 내가 추천해 총리 대신에 앉혔다. 운산금광 관할을 농상공부에서 (왕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궁내부로 옮기는 데도 성공했다.

다른 문제가 많았는데 뜻밖에도 왕비가 구원을 했다. 지금 서명을 끝내고 봉인된 계약서가 공사관 금고에 있다.'(1895년 6월24일 'J.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알렌문서 MF361) 계약서 서명 날짜는 7월15일, 기원 경절 하루 전날이다. 일개 외국 서기관이 한 나라 내각을 갈아치우고 그 나라 왕비가 벌인 작업이 매장량이 아시아 최대였던 운산 금광 팔아치우기였다. 1894년 농민들이 탐관오리 학정에 저항해 군사를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 군사를 불러 들였다. 이에 일본군도 개입해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혁명과 전쟁 뒷수습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1895년 11월15일 확정된 1896년도 조선정부 세출 예산에 이런 항목이 보인다. '을미 차관 이자' 18만원. 1895년 3월 일본으로부터 빌린 차관 300만원에 대한 이자다. 세입 총 예산은 480만9410원이었다.('고종시대사 3집', 1895년 11월15일 건양원년도 세입세출예산표) 농민혁명도 정부가 원인이었고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것도 조선 정부였다. 그 뒷수습을 위해 그 조선 정부가 비싼 외국 돈을 갖다 쓰고 있었다. 1897년도 이자 18만원은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31일에야 갚을 수 있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2권, '을미차관 이자 및 동서한전달 의뢰') 돈, 돈이 필요했다.

1884년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알렌은 바로 그해 갑신정변을 계기로 왕실과 연을 맺었다. 1884년 12월4일 서울 종로 우정국에서 왕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이 개화파 자객에게 칼을 맞았다. 이 실세를 죽음에서 구해준 의사가 알렌이었다. 알렌은 이듬해 1월27일 살아난 민영익으로부터 사례금 10만냥을 받고(알렌일기 1895년 1월27일), 이어 병원 설립까지 허가를 받았다. 이 병원이 조선 최초 근대병원인 광혜원이다. 위치는 갑신정변 때 살해당한 가회동 홍윤식의 집이었다.

개원은 4월10일이었다. 개원을 목전에 둔 3월27일 알렌은 궁궐로 들어가 고종 부부를 치료했다. 부부는 천연두 증세를 앓고 있었다. 한달 뒤 왕비로부터 하사품이 왔다. 100야드짜리 비단 한 필과 황금빛 비단 두루마기 하나였다. 알렌은 곧 왕실 주치의 겸 고종 정치고문이 됐다. 1887년에는 정2품 참찬 벼슬을 받고 조선 사신들과 함께 미국을 다녀왔다.

그리고 3년 뒤 알렌은 주한 미합중국 공사관 서기관에 임명됐다. 조선 권력구조와 재정을 손바닥처럼 알고, 고위층과 깊은 연대를 가진 미국 외교관이었다. 알렌과 함께 미국을 다녀온 전권대사 박정양이 이리 보고하였다. "미국은 본래 남의 땅에 욕심이 없나이다"(1889년 7월24일 '고종실록') 1882년 미국과 맺은 수교조약 1조는 '타국이 유사시 중간에서 잘 조처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여준다'고 규정했다. 조선정부는 이를 철썩같이 믿었다.

1897년 알렌이 주한 공사에 취임했을 때 고종이 보낸 편지에는 '미국은 조선에 큰 형'이라고 돼 있었다.(1897년 9월13일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서한', '한미관계 자료집') 엿새 뒤 국무부 장관 셔먼이 알렌에게 비밀 서한을 보냈다. '미국은 조선 국내 문제는 물론 외부의 방위 연대도 맺고 있지 않다.'(1897년 9월19일 셔먼의 비밀서한, '한미관계자료집') 최고지도자 고종부터 하위 관료까지 조선은 순진했다. 알렌이 살려준 민영익은 현금 10만냥만 준게 아니었다.

1885년 민영익은 알렌에게 광산 이권에 대해 언질을 줬다.(알렌문서 MF361, 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재인용) 그리고 조선 정부는 알렌에게 병기창과 화약공장 특허권도 제안했다.(F 해링턴) 이후 조선 금광을 찾는 미국인 조사단 발길이 이어졌다. 1888년 알렌은 광산기사 피어스를 파견해 운산금광을 조사했다. 1889년에도 기사 5명이 내한했다. 조선 정부 예산으로 조선 광산 정보를 모은 사람은 조선 외교관 알렌이었고 그 금광을 미국 소유로 만든 사람은 미국 외교관 알렌이었다. '모스씨에게, 오래도록 왕과 조선을 위해 일을 한 결과, 마침내 중요한 걸 얻었습니다. 왕께서 무보수로 일해줘서 고맙다며 선물을 하겠답니다. 그동안 저는 고위 관직을 다 제 친구들로 채웠죠. 아무도 예상 못한 박정양이 저 덕분에 총리대신이 됐고요. 이들이 저한테 미국 차관 200만달러를 부탁했습니다. 운산금광을 넘기면 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모스에게 보낸 편지. 알렌문서MF361)'

심지어 농광산부대신 김가진에게 '금광 관할권을 왕실 궁내부로 넘기면 왕이 좋아할 것'이라고 귀뜸해 성공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면 알렌은 모스에게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면 '알렌, 서울, 예스'라고전보를 쳐달라"고 했다. 금광을 위해 정부를 조직했다는 말이다. 그때 알렌은 주한 미공사관 서기관이었다.

알렌 문서 마이크로필름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진행 중인 건양대 알렌 문서팀(연구책임자 김현숙) 연구원 김희연은 "알렌은 자기 과시욕이 강한 인물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1901년 7월5일 미국무부는 알렌에게 이런 서한을 보냈다. '다른 국가와 친하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 관리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미국으로서는 정당화 될 수 없다'(힐 국무부 차관보, '알렌에게 보내는 편지', '한미관계 자료집' 문서 174호) 무언가 알렌이 1901년에도 조선 정부 인사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증거다.

어찌됐든, 알렌은 조선정부를 자기 파벌로 가득 채워넣고 운산 금광 채굴권을 따냈다. 1895년 7월15일이다.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시해된 뒤 잠시 중단됐던 계약은 이듬해 4월17일 정식으로 맺어졌다. 실록에는 '을미년 윤 5월에 허가했다가 조금 뒤 취소하였는데 다시 허가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1896년 4월17일 '고종실록') 정작 고종이 원했던 200만달러는 얻지 못했다.

계약서 '운산광약'은 초안에는 '자본 가운데 25%를 궁 내부를 통해 대군주에게 진상한다'고 돼 있다.(통감부 문서 2권, '운산광산 채굴권 계약서 한국측 서명자 보고 건') 현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1899년 3월27일 조선정부는 '운산금광회사'와 '조선정부 지분을 전부 매입하고 해마다 2만5000원을 지급한다'고 조건을 수정했고 1900년 1월1일 일시불 1만2500달러에 채굴기한을 25년에서 40년으로 연장했다. 또 '필요할 경우 채굴 허가기간을 1954년 3월27일까지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미국측은 운산 주변 벌채권도 획득했다.

이미 재래식으로 채굴을 하고 있던 현지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지자 알렌은 이렇게 광산회사에 편지를 보냈다. '그럴때에는 조선인을 적법한 태형으로 처벌해도 좋다'(1900년 11월1일 '미서브에게 보낸 편지') 그 주민들에게 미국 업자들이 '금광석 건드리지 말라'며 소리친 'No Touch!'가 지금 금을 가리키는 '노다지'가 되었다.

미국이 1896년부터 광산을 일본에 넘긴 1938년까지 운산에서 파낸 금광석은 900만톤이 넘었고 순이익은 1500만 달러였다. 1879년부터 1915년까지 8년동안 낸 생산액은 1956만8632원이었다.('이배용') 그런데, 청일전쟁 후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한 대일 부채는 1907년 현재 1300만원이다.(1907년 2월21일 '대한매일신보') 그 돈을 갚기 위해 대한제국 황민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결국 갚지 못한 부채는 망국의 빌미로 이어졌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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