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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인기사<115> 백옥 들고 황금치마를 두른 황후 | '발해왕의 세번째 발터'에 전해오는 미담
발해국의 임금이 왕후를 여의고 새 국모를 맞이하는 이야기 | | | | 입력시간 : 2020. 12.15. 13:06 |
 | | 연해주 발해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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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성을 지나 가노라면 산모퉁이 강가에 돌로 깎아 만든 층층대의 흔적이 보인다. 이고장 사람들은 이 돌 층층대를 '발해왕의 세번째 발터'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런 미담이 전해진다. 옛날 발해국의 임금이 왕후를 여의었다. 그러자 문무대신들이 모여 앉아 국모(國母)가 없어서야 될 말이냐며 어떤 여자를 왕후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해 공론하게 되었다. 이때 한 대신이 이번의 왕후는 반드시 '손에 백옥을 들고 몸에는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이어야 한다'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으니, 그에 합당한 여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문무백관들이 모두 그 의견에 찬성하여 그런 규수를 백일 안에 찾아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튿날부터 수많은 나졸을 풀어 서울 장안의 집들을 샅샅이 뒤지게 하는 한편 혹시 서울 밖에도 그런 규수가 있을지 모르니 한강 동쪽에 열 길이 넘는 망대루를 밤낮으로, 한시도 빠짐없이 망을 보게 하였다. 흐르는 물같이 빠른 것이 세월인지라 어느덧 석달이 지나고 아흐렛날이 저물어갔다. 이제 하루가 지나면 백일이 되는데, 그날까지도 '손에 백옥을 들고 몸에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임금도 더는 용상 위에 앉아 있지 못하고 서서 서산 위로 올라앉은 저녁 해를 바라보며 탄식을 하였다. "내 팔자가 기구해서 그렇듯 현숙한 왕후를 잃었으니 어느 규수가 박복한 나에게 오려고 하리오?" "상감마마, 너무 심려하실 일이 아닌 줄로 아뢰옵니다. 손에 백옥을 들고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마마의 품덕을 높이 치하하여 선녀를 내려보내시는 것으로 아오니 자중하시고 기다리면 분명 뜻을 이를 줄로 아옵니다!" 예경부의 말을 들으며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연못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원앙 한쌍을 바라보던 임금은 더욱 탄식하였다. "글쎄 말이오! 미물인 짐승도 짝이 있어 저렇게 즐거운데, 나라 10부42주3천리 넓고 넓은 곳에 어찌 임금의 짝이 될 규수가 없겠소만, 내 지금껏 덕을 쌓지 못하고 악만 쌓다보니 천벌을 받는가 보오"
이때 망루 위에서 망을 보고있던 나졸들도 서쪽 하늘에 붉게 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헛수고일세, 이제 그만 내려가세" "그러게 내 뭐라고 했나? 모르긴 해도 손에다 백옥을 들고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새빨간 거짓일세" "쉬! 목 떨어질 소리 작작하게!" 이때 한 나졸이 누가 듣지 않았나 하여 얼굴이 새파래져서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눈을 비비고 다시 아래쪽을 내려다보더니 소리쳤다.
"아, 아니! 저, 저기 나타났다! 나타났어! 여보게, 저길 보게나!" "허허, 이 사람이 헛물만 켜더니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계집애들처럼 웬 호들갑이야?" "왕후란 말일세!" "뭐? 왕후? 자네 돌았나? "무슨 소리야, 자네 눈엔 저기 저 왕후가 안보이나?" "정말이야? 어디, 어디, 엉? 옳군 옳아! 이보시오, 게 잠깐만 서시오!" 나졸은 수탉처럼 목을 길게 빼들고 손나발을 불었다. "자네 눈 한번이라도 깜박이지 말고 저 분이 어디로 가는지 잘 지켜보고 있게. 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모시고 오겠네" 나졸은 기뻐 단숨에 규수가 나타난 골목길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근방으로 가서 오가는 사람마다 죄다 물어보고 살펴보았으나 백옥을 들고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는 고사하고 그와 비슷한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망루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어이, 이보게! 어느 쪽으로 갔나?" "방금 자네 앞을 지나갔네!" 바람결에 간간이 들려오는 친구의 대답 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웬 처녀가 몸에 옷이 아닌 마대를 두르고 손에는 접시에다 두부 한 모를 담아가지고 가고 있었다. 너무도 실망한 나졸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멀어져 가는 처녀를 쳐다보다 맥없이 돌아왔다. "아니, 왕후감은 어쩌고 혼자 오는거야?" "공주라니? 쳇, 자네 눈이 멀었군 그래!" "뭐라고?" "아, 그렇지 않고서야 손에 든 두부를 옥으로 보고 마대 두른 것을 황금치마로 보았겠나?" "그래?" 두 나졸이 하도 어이가 없어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예부령 대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사실을 고했더니 대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말하였다. "내일은 마지막 날이니 명심해서 살피게나!" 이튿날 예부경 대감은 친히 임금님을 모시고 망루 위에 앉아서 어제 나타났다는 그 처녀가 다시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간장을 태우는 규수는 나타나지 않고 백일의 마지막 해가 서산 위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넘어가는 해를 산 위에다 붙잡아 매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임금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마마, 나타났습니다. 저기, 저길 보시옵소서!" 임금과 대감이 나졸의 손길을 따라 황급히 내려다보니 아니나다를까 머리채를 길게 땋아 드리운 한 규수가 몸에는 황금치마를 두르고 두 손엔 백옥을 받쳐든 채 붉게 타는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상감마마, 이는 분명 옥황상제께서 마마께 보내주신 선녀인 줄로 아뢰옵니다" 대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어서, 어서 가서 정중히 모셔오도록 하오!" 하며 재촉을 했다. "예! 분부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 예부경이 나졸과 함께 망루에서 내려가 처녀 앞에 다가가 보니 어제 나졸이 하던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대감은 그 규수가 옷은 비록 남루해도 천하일색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대감은 나졸들더러 그 규수를 모시고 다시 한번 망루 앞을 지나게 하고 임금을 모시고 다시한번 그 규수를 눈여겨보았다. 임금과 대감이 망루 위에서 내려다보니 가까이에서 보는 바와는 달리 틀림없이 황금치마를 두른 규수가 손에 백옥을 들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대감은 저녁노을 빛에 반사되어 마대가 황금치마로 보이고 손에 든 두부가 백옥으로 보였음을 알게되었다. 임금이 그 규수를 앞에 불러놓고 보니 과연 진흙 속에서 빛을 내는 보석이요, 별중에서도 샛별이며, 새 중에서도 봉황새라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규수에게 물었다. "그대의 집은 어디인고?" "성 밖에 있사옵니다" 규수는 목소리까지도 은쟁반에 옥 굴러가는 듯 맑고 아름다웠다. "집에는 누구와 함께 사는고?" "연로하신 부친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음, 알겠다" 처녀는 빈곤하게 사는 어부의 딸이었다.
평생을 강에다 발을 놓고 고기잡이로 늙어온 노인은 고기를 잡으면 딸을 시켜 물고기를 팔아 그 돈으로 쌀과 채소를 사다가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효녀인 처녀는 늙으신 부친께서 오래오래 사시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는 죽을 먹으면서도 부친께는 날마다 술과 두부를 사다가 대접했다. 처녀는 집으로 돌아와 찌개를 끓여놓고 부친께 약주를 따라 올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임금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예부경 대감이 사령들을 데리고 예물을 가지고 왔다. 그 후 좋은 날을 택해 잔치를 하니 그 규수는 왕후가 되고 어부인 처녀의 아버지는 부원군이 되었다. 옛말에 후처한테 감투 벗어지는 줄 모른다더니 임금이 계비인 왕후를 애지중지하다 보니 장인도 궁중에 모시고 친아버지 이상으로 받들어 모셨다. 세월이 흘러 천년이 지나 사람도 변하고 산천도 변했지만 발해왕의 발터 자리와 산하는 오늘까지도 남아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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