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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 - 아, 비극의 소현세자
인조는 나라를 망치고 자식 며느리 손자까지…?
진보적이고 개명한 사상을 오랑캐 문물에 넋을 판 파렴치로 낙인
편협한 인조는 소현세자 내외와 친손자에게까지 잔혹한 저주
입력시간 : 2021. 09.09. 14:54


소설 '소현', 소설가 김인숙.
임진왜란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전쟁인가. 조선왕조 역사상 병자호란(1636)은 가장 큰 비극이었다. 임금(인조)이 적장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 문서를 올려서 오랑캐라고 천시하던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겨야 했고, 두 사람의 왕자와 신하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을 인질로 적국에 보내야 했던 참극이었기 때문이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할 소현세자(昭顯世子)도 빈궁(강씨)과 함께 오랑캐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만주벌판의 북쪽이어서 우리 조선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혹독한 추위에 떨어야 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청나라의 강요를 모국의 조정에 전해야 하는…, 그야말로 인질로 살아야 하는 통한의 세월이 장장 9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청나라의 섭정왕 다이곤이 장군 오삼계(吳三桂)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진군할 때, 그는 소현세자에게도 동행을 청했다. 강요나 다름없는 청함이라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으나, 조선에 다녀오면서 부왕(인조)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 우울해 있었던 소현세자는 지친 마음도 달랠 겸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다이곤을 따라 북경에 가기로 한다. 조선과도 다르고 심양과도 또 다른 북경의 풍물은 소현세자의 모든 관심을 일거에 끌어당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명나라는 망하고 없어도 그들의 문물과 풍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중에서도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이 그를 눈뜨게 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문 것은 고작 70여 일에 불과했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실로 7년의 세월에 버금가는 일대 ‘변혁의 시간’이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중에서도 북경교외에 있는 남성당(南聖堂)에 와 있던 서양 신부이자 과학자인 아담 샬(J.Adam Schall-중국명 陽若望)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소현세자의 세상을 바꾸어 놓은 일대 전기가 되었다.

그는 아담 샬과 자주 만나면서 역법, 천문학, 천주교 등과 같은 서양문물에 거침없이 심취해 들어갔다. 이에 부응하듯 아담 샬은 친절하고 자상하게 소현세자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로서는 장차 조선의 임금이 될 소현세자에게 서양 문물의 깨우침과 더불어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 앞날을 위해서도 긴요한 포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소현세자는 촌각을 아껴 쓰며 되도록 많은 것을 배우고자 힘썼다. 그 자신에게도 크나큰 포부가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담 샬은 자신이 한역한 「천문역사서」와 「지구」의 「천주상」 등과 같은 진귀한 서책과 물건들을 소현세자에게 선물했다. 이에 화답한 소현세자의 서찰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귀하가 주신 천주상과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즉시 그중 몇 권의 책을 읽어보았는데, 그 속에서 정신수양과 덕행을 실천하는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아마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아담 샬에게 보낸 소현세자의 편지를 보면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 서구 문물에 대한 소현세자의 관심과 흥미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아담 샬과의 돈독한 우의도 꽤 깊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편지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도 보여주고 있다.

25세에 청나라에 끌려가 장장 9년간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34세의 연부역강한 나이가 되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는 소현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개명하고 진보적인 임금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섬겨야 할 청나라의 내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가 패망하는 사상적인 배경을 몸소 확인했으며, 아울러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의 문물까지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추었기에 조선왕조 최초의 개명하고 진보적인 임금이 될 왕재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 개명과 진보적인 사상이 자신을 비운의 왕세자가 되게 하는 원인임을 어찌 짐작이나 했던가. 타인의 쿠데타로 왕위에 옹립되어 지독한 정쟁에 시달리던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조는 희망과 포부를 안고 귀국한 아들 소현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를 금지했다. 세자의 진보적이고도 개명한 사상을 오히려 오랑캐의 문물에 넋을 판 파렴치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상심한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인 그해 4월 23일 병상에 눕게 된다. 어의(의사)는 학질이라고 진단했으나, 인조는 엉뚱하게도 세자에게 침놓기만을 강요했다. 마침내 소현세자는 발병한 지 이틀만인 26일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치료과정 때문에 소현세자는 편협하고 의심 많은 아버지의 용렬함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지만, 그 후에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복제를 12일 만에 마치게 하는 등의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 뿐만아니라 맏며느리인 세자빈 강씨에게 까지 누명을 씌워 강제로 폐출하더니 곧 사사했으며, 세손 석철을 비롯한 두 손자까지를 모두 제주도에 귀향을 보내는 등의 잔혹한 저주를 계속했다. 친아들 내외와 친손자에게 가한 인조의 편협을 피를 나눈 아버지의 소행으로 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역사를 가정(假定)에 적용하여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아쉬움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것은 우리가 정신적, 물질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기에 자초할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비극의 씨앗으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조와 같이 옹졸한 군왕의 치세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백해무익하다는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한다. 아울러 ‘아흔 아홉가지 선정이 한가지 악정을 상쇄하지 못한다’는 선현의 가르침이 정말로 뼈아프다는 사실 또한 다시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을 어찌하랴.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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