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7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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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딸과 가로정승
추위에 얼어죽었다 사또의 도움으로 살아난 규수
간택 돼 왕후가 된 뒤 사또에게 은혜를 갚는 사연
입력시간 : 2023. 05.23. 09:46


사랑은 결혼의 새벽이고, 결혼은 사랑의 황혼이라고들 말한다. 한편 10대 부부는 시큼한 오렌지 맛이요, 20대 부부는 달콤한 무화과 맛이고, 30대 부부는 떨떠름한 올리브 맛이라 한다. 한데 왕실 혼인은 어떻게 이뤄졌으며 애정은 어느정도 였을까? 옛날 왕실의 임금이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는 직접 간택을 하여 뽑았는데, 신하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수소문하여, 학식을 갖춘 인물 곱고 총명한 처녀를 뽑으면, 그중에 한 명을 임금이 직접 선택을 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간택에 뽑힌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간택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곳으로 시집도 가지 못하고 궁녀가 되었다.

그것은 장래에 임금이 될 귀한 분과 말이 오갔던 사람이 어찌 다른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겠느냐는 데서 비롯된 관습이었다. 그렇던 시절에, 한 선비의 딸이 물망에 올라 간택이 되었다. 가난한 선비의 집안이었던지라 그나마 딸은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가마를 타고 아버지는 그 뒤를 걸어갔다. 때는 섣달하고도 가장 추운 대목이라 살을 에이는 찬바람 속에서 하루종일 걷다보니 짐꾼들도 맥이 다 빠져 고개를 넘어서자 주막집을 찾아갔다. 가마가 주막집 마당에 이르자 선비는 가마의 문을 열며 딸에게 말했다. “얘야, 얼마나 추웠느냐. 얼른 내려서 몸도 녹이고, 예서 하룻밤 묵고 가자꾸나” 그런데 말을 마친 선비가 갑자기 울음보를 터트렸다. “아니 얘야! 이게 웬일이냐?” 선비는 이내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 마침 선비보다 먼저 주막집에 와 저녁을 먹고있던 한 고을의 원님이 초라한 가마가 들어오는 것을 내다보다가는, 선비가 대성통곡을 하자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나졸을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사또님께 아뢰옵니다. 상감마마의 부름을 받고 간선에 뽑혀가던 이팔청춘의 규수가 추위에 그만 얼어죽어 그 부친인 늙은 선비가 울고있는 줄로 아뢰옵니다” “뭣이? 이런 변이 있나! 죽은지 얼마 안되었다면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을테니 속히 데리고 들어와 따뜻한 방 아랫목에 눕히고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원님의 분부가 내려지자 나졸들은 물론, 주막집 주인과 객들까지 모두 부산을 피워대는데, 원님이 손수 사향과 청심환을 더운물에 개어서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처녀의 입에다 떠 넣어주었다.

이리하여 처녀는 밤중으로 다시 살아난 듯 회복을 하게 되었다. 이튿날, 선비와 딸은 원님 앞에 꿇어앉아 큰절을 올렸다. “사또님의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소저가 다시 살아났으니 천만다행일세!” 원님은 이렇게 말하며 팔에 끼고있던 토끼털로 만든 토시를 벗어 주었다. “내 몸에 지닌 것이 이것밖에 없어 달리 줄 것은 없고, 먼 길을 가는데 이거라도 가져다 끼고서 한기를 막도록 하시오” 선비와 딸은 너무나 감격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또님의 은혜 두고두고 잊지 않겠나이다!” 기필코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맹세한 부녀는 원님과 작별을 하고 돌아섰다.

그리하여 다시 길을 떠나는데, 딸은 아버지 보고 토시를 끼라고 하고, 아버지는 딸더러 어서 끼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이렇게 활개를 치며 걷는데 내가 추울 리가 있나, 가마 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은 네가 춥지. 내 걱정 말고 어서 너나 끼어라” “가마 안은 방풍이 되어 춥지 않사오니 어서 아버님께서 끼시옵소서” 그들은 이렇게 서로 사양하다가 결국엔 한짝씩 나눠끼고 서울로 올라왔다. 선을 볼 때 일일이 누구의 딸이냐고 묻지 않아도 임금님이 바로 알 수 있도록 꽃방석마다 어느 고을의 누구라고 아버지 이름을 써놓아 간택된 처녀들은 자기 부친의 이름을 보고 그 꽃방석 위에 앉으면 되었다. 그러면 임금은 용상 위에 앉아서 일일이 묻지 않고서도 누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라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하기로 이름난 처녀들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서 꽃방석 위에 나비처럼 사뿐사뿐 꿇어앉았다. 그런데 유독 한 처녀만이 꽃방석 위에 앉지 않고 방석 위에 꿇어앉는게 아닌가. 임금은 그 처녀가 누구의 딸인지는 알겠으나, 어째서 꽃방석 위에 앉지 않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음, 소저는 어찌하여 방석 위에 앉지 않는고?” “상감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뿌리 없는 나무 어디 있으며,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소녀 앉을 방석 위에 부친의 성함이 있사옵기에 깔고 앉을 수가 없어 이렇게 바닥에 앉았사옵니다” 임금은 과연 총명하고 예의범절이 출중한 효녀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흐뭇해하며 다른 처자들의 총명함과 재질을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뭐라고 생각하는고?“ 그러자 처녀들은 뒤질세라 법이요, 귀신이요, 양반이요, 임금이요 하고 대답하는데 선비의 딸만은 대답을 하지않고 있었다. ”음, 소저는 무서운게 없는가?“ ”아니오, 있사옵니다“ ”그래, 그럼 무엇이 제일 무서운고?“ ”거두어야 할 식솔은 많은데, 쌀독에서 바가지 긁은 소리가 나는 것이 제일 무서운 줄로 아뢰옵니다“ ‘옳지! 내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국고에 돈과 쌀이 없어서 만백성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보다 더 무서운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지. 과연 나라의 쌀독을 책임질만한 안주인의 대답이로다’

”그렇다면 이번엔, 이 세상에서 무슨 꽃이 제일 좋은고?“ 그러자 이번에도 처녀들은 너도나도 모란꽃이요, 연꽃이요 하고 제작기 말하는데 선비의 딸만은 달랐다. ”꽃 중에서 가장 좋은 꽃은 목화꽃인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 뜻을 상세히 알고싶어 캐물었다. ”목화꽃으로 치자면 향기도 없거니와 빛깔도 보잘 것 없는데, 왜 가장 좋은 꽃이라고 생각을 하는고?“ ”목화꽃으로 말하자면, 꽃이 피었다 지고 결실을 맺으면 목화솜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솜을 타서 만백성은 물론이요, 임금님의 옥체를 보전하시도록 추위를 막을 수 있사오니 이보다 좋은 꽃은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이리하여 선비의 딸은 간선에 뽑혀 임금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임금이 돌아가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선비의 딸은 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왕후는 종일 가야 웃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 새 임금은 의아하게 여겨 농담삼아 물었다. ”중전께서는 한낱 시골선비의 딸로서 왕후자리에까지 올랐건만 무엇이 그리 부족하여 웃을 줄을 모르시오?“ ”그래서가 아니오라, 국사에 바쁘신 상감마마께 심려를 끼쳐드릴까봐 아뢰지 못했나이다“ ”어려워 말고 어서 말해보시오“ 이리하여 선비의 딸인 왕후는 간선을 보러 올 때의 일을 소상히 아뢰었다. ”그렇게 고마우신 사또님이 계셨기에 오늘날 제가 상감마마를 모시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여 웃지를 못하고 있나이다“ ”오! 그런 사연이 있었구려. 나를 용서하시오, 중전. 내 중전의 속마음도 모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 임금은 즉시로 영의정을 불러 상황을 설명한 뒤, 그때의 그 군수를 찾아 대령케 했다.

어명이다보니 불과 며칠만에 군수를 찾아내어 그 군수는 영문도 모른채 어전으로 불려왔다. 왕후가 토끼털로 만든 토시를 군수에게 내보이며 기억을 하겠느냐고 묻자, 군수는 깜짝 놀라며 간선을 보러 가는 규수에게 자기가 주었던 토시라고 했다. 왕후는 자기가 바로 그때 그 규수라고 말하며 군수를 반겨 맞아, 마치 친부모를 모시듯 대접을 하였다. 후에 군수는 순풍에 돛 단 듯이 벼슬길에 올라 정승이 되었고, 그 연유로 사람들은 그를 가로정승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고운석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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